나무가 가진 힘[이정향의 오후 3시]

  • 동아일보
  • 입력 2023년 5월 17일 03시 00분


〈66〉프레데리크 바크의 ‘나무를 심은 사람’

이정향 영화감독
이정향 영화감독
1913년. 알프스의 오지를 여행하던 청년은 폐허가 된 마을에서 홀로 사는 부피에를 만난다. 가족을 모두 잃어 외톨이인 그는 매일 도토리 100개를 하나씩 땅에 심는다. 그래도 제대로 자라는 것은 열에 하나뿐이라며 하루도 거르지 않는다. 지금까지 10만 개를 심었다. 청년은 몇 년 뒤 다시 그곳을 찾는다. 부피에가 심었던 도토리들은 숲을 이뤘다. 시냇물이 흐르고 새들이 돌아왔다. 세월이 흘러 부피에는 여든이 넘었지만 여전히 나무를 심는다. 숲의 혜택을 누리며 사는 마을 사람들은 그 숲이 저절로 만들어진 것이라고 여긴다. 부피에는 세상을 뜰 때까지 자신이 수십 년 동안 해 온 일을 생색내지 않았다.

나무를 심는 사람은 나무와 닮았다. 긴 안목으로 끈기 있게 묵묵히 기다릴 줄 아는 능력자이다. 내가 나무를 좋아하는 이유는 나무가 지닌 성정을 나는 하나도 못 갖췄기 때문이다. 나무는 성실하다. 불평하지 않는다. 인간에게 주기만 하면서 결코 자랑하지 않는다. 무엇보다도, 말이 없다.

최근에 세종시에 갔었다. 지도를 보며 걸었는데도 길치답게 헤맸다. 허둥대며 제시간에 맞췄지만 앞 순서들이 꽤 밀려 있었다. 심판기일에 의견진술을 하고자 간 터였다. 주변에선 전문가에게 맡겨야 한다고 말렸지만, 자신감 과잉이었을까? 부모님 앞으로 부과된 재산세, 상속세, 심지어 건강보험료까지 계산 착오로 과하게 부과된 걸 내 힘으로 밝혀낸 전적이 있기에 의견진술을 위한 서류 작업에 몰두했다. 내 머릿속은 점점 곡선 대신 직선으로 가득 찼다.

한 시간 반을 기다리자 내 차례가 왔다. 들어가자마자, 내가 제출한 자료가 충분해서 진술은 필요 없다며, 질문이 없으면 가도 된다고 했다. 예상 못 했다. 여러 달을 준비했기에 그 정성을 알아주십사 두서없이 떠들었다. 5분짜리 코미디를 찍은 셈이다. 전문가들이 오르는 링 위에 깜냥도 모르고 덤빈 걸까? 차라리 영화 만들 때 도움 되게 심판실 정경이라도 눈에 담을걸, 당황한 탓에 하나도 기억이 안 났다. 직업을 밝히고 잠시 구경 좀 하겠다고 할걸…. 다양한 아쉬움으로 끌탕을 치며 걷다가 무심코 고개를 들었다. 올 때는 몰랐는데, 사방이 녹색이다. 잔디도, 나무도 반짝반짝 초록의 기운을 뿜고 있다. 순간, 내가 우주에서 나를 내려다보는 듯했다. 내 안의 커다란 덩어리가 공기 빠진 풍선처럼 쪼그라들었다. 세상은 이렇게 푸르른데, 더 소중한 것들이 많은데, 나 여태 뭘 한 걸까? 내 안의 직선들이 부드럽게 휘어졌다.

동화가 원작인 애니메이션 영화다. 감독 프레데리크 바크는 5년간 이 영화를 만드느라 한쪽 눈의 시력을 잃었다. 나는 몇 달간 서류와 씨름하느라 안과 신세를 졌다. 죄송합니다.

#나무가 가진 힘#프레데리크 바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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