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글로벌 경제를 시끄럽게 하는 미국의 국가부채 한도 협상은 그 기원이 1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초 미국 행정부는 나랏빚을 내야 하는 일이 생기면 항목별로 건건이 의회 승인을 받아야 했다. 그런데 제1차 세계대전이 터지며 전쟁비용 지출이 급증하자 의회는 전체 부채한도만 정해놓고 행정부가 그 범위 내에서 자유롭게 빚을 낼 수 있도록 법을 바꿨다. 이 한도는 지금까지 전쟁이나 경제위기가 있을 때마다 여야 협상을 통해 지속적으로 늘어났다. 올해도 한도 인상 여부를 놓고 정치권의 기싸움이 연례행사처럼 되풀이되고 있다.
이처럼 본래 정부 지출을 원활히 해주기 위해 시작된 부채 상한제는 지금은 반대로 정부의 과도한 나랏빚을 통제하기 위한 수단으로 활용되고 있다. 의회가 한도를 늘려주지 않으면 연방 정부는 공무원 월급을 주지 못하는 것은 물론이고 국채 원리금을 지급하지 못해 디폴트에 빠지게 된다. 정부는 이런 최악의 상황을 막기 위해 평소 예산 편성과 지출에 신중을 기할 수밖에 없다. 미국은 이 밖에도 재정 지출이 수반되는 법안을 제출할 때 반드시 재원 조달 방안을 함께 제시하는 페이고(PAYGO) 제도 역시 법으로 명문화했다.
미국 등 선진국은 재정 파탄을 막기 위해 이처럼 이중 삼중의 ‘방파제’를 쌓아왔다. 미국의 디폴트 위기는 워싱턴 정가의 난맥상과 극심한 정쟁의 상징일 수도 있지만 뒤집어 보면 건전재정의 절실함을 정부와 의회가 얼마나 잘 인식하는지를 보여주는 사례이기도 하다. 하지만 미국 같은 강대국도 기축통화국도 아닌 한국은 재정 누수를 막을 방파제도, 급증하는 나랏빚이 어떤 결과로 이어질지에 대한 위기의식도 없다. 1000조 원을 넘어선 국가채무가 지금도 1분에 1억 원씩 늘어나고 있지만, 국회는 전 세계 100여 개국이 운영하고 있는 재정준칙 도입 법안을 31개월째 뭉개고 있다.
여야 의원들의 최대 관심은 어떻게 하면 나랏빚을 줄일까가 아니라 반대로 어떻게 하면 나랏돈을 더 쓰는가에 있다. 국회 기획재정위원회 의원들은 총선을 앞두고 선심성 지역사업을 추진하기 위해 예비타당성조사 면제 기준을 완화하려 했고, 얼마 전에는 건전재정 사례를 공부한다면서 혈세를 들여 유럽에 열흘간 출장을 다녀왔다. 그래 놓고 이들은 귀국 후 처음 열린 법안 심사 회의에서 재정준칙을 가장 마지막 안건으로 배치하며 사실상 고의로 논의를 회피했다. 그러면서 돈을 쓰자는 법안은 무차별적으로 발의한다. 본보가 국회 계류 법안들을 분석해봤더니 정부 재정이 지출되는 법안 497개의 추계 비용은 418조 원으로 집계됐다. 나라 예산의 3분의 2에 해당하는 규모다.
재정준칙은 연간 재정적자 폭을 국내총생산(GDP)의 3% 이내로 줄이자는 것으로 전 세계 모든 선진국이 보편적으로 도입한 원칙이다. 또 경제위기 같은 급박한 상황에는 적용 예외가 되는 만큼 어느 정도 융통성도 갖췄다. 이런 기초적인 장치마저 거부하는 것은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국가채무에 눈을 감고 나라 살림이 거덜 나는 것을 그대로 방치하겠다는 것과 다름이 없다. 누군가가 한국 정치 포퓰리즘의 역사를 주제로 책을 쓴다면 이번 국회 기재위는 당당히 한 챕터를 차지하고도 남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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