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 생활을 막 시작했을 무렵, 사수는 엉망진창 내 기사를 뜯어고치며 글쓰기 원칙을 상기시켜 주곤 했다. 그중엔 되도록 동어 반복을 피하라는 것도 있었다. 경제적이지도 않을뿐더러, 지적으로 느슨해서 아름답지 않다는 이유에서였다. 같은 표현을 쓰다 보면 관점이 강조되고, 한쪽 입장으로 비탈지게 빨려 들어가니 조심하라는 경고도 함께였다. 불가피한 되풀이도 있지 않나? 그때 나는 항변하고 싶었는데 지금 와서 돌이켜보니 세상 모든 원칙이 그러하듯 절대성을 지닌 명령이라서가 아니라, 함의가 더 와닿는다. 동어 반복은 무신경하고 섬세하지 못한 자들의 방식이라는 점 말이다.
제목에서부터 같은 말이 두 번 쓰인 영화 ‘말이야 바른 말이지’(말바말)는 바로 이 나태한 동어 반복의 논리를 파고든다. ‘말바말’이라는 표현 앞뒤로는 대체로 부주의하고 게으른 문장들이 따라붙기 십상이다. 영화는 상투적 관점과 표현 속에서 뒤틀린 신념 구조가 어떻게 공고화되는지, 그리고 우리가 이에 얼마나 둔감한지를 보여준다.
영화는 10분 내외의 짧은 여섯 편 단편으로 짜인 옴니버스 구성이다. 각각 다른 감독들이 연출을 맡았는데 각 작품마다 노사, 젠더, 지역, 세대 갈등이라는 우리 사회의 주요 어젠다를 끌고 들어온다.
대기업 관리자와 하청업체 대표가 직원을 어떻게 길들여 왔는지 대화하다가 서로 냉소(프롤로그)하고, 헤어지는 커플이 함께 키우던 고양이를 어떻게 할지 무신경하게 대화하며 동물에게 상처를 주는 모습(하리보)을 다룬다.
애견용품업체가 남성 혐오 단어로 지목된 ‘허버허버’와 비슷한 ‘허버버법’이라는 문구를 마케팅에 활용해 사과문을 작성(진정성 실전편)하고, 환경을 마구 오염시키는 방식으로 프러포즈(손에 손잡고)하는 에피소드가 담겼다. 상사와 부하 직원 간의 대화(새로운 마음)를 통해 은근한 성차별이 어떻게 작동하는지도 조명한다. 각 에피소드마다 다소 얼마씩 무신경한 사람들이 나온다. 그들은 동어 반복의 주체가 되며, 의식하지 못하는 가운데 폭력적이다.
영화가 주장이 담긴 사회 이슈임에도 ‘비분강개’가 아니라, 농담이라는 형식을 끌고 온다는 점 역시 인상적이다. 첨예한 갈등 이슈를 블랙코미디 형태로 가공하는 과정에서 세상을 담론의 영역이나 진영 논리로만 다루지 않고 유머 속에서 폭넓게 문제의식을 펼쳐놓는다.
그동안 기득권과 이에 핍박받는 이들의 대결 서사를 자주 봐왔으나, 이는 우리 사회의 첨예한 갈등의 본질을 지나치게 단순화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기득권 적의 소멸이라는 해법을 유일한 대안으로 여기다 보면, 어떤 사회가 더 바람직한지 묻는 진짜 어려움을 외면하기 십상이다. 진영적 거대 담론에 기여하는 서사만을 의미 있게 여기는 과정에서 기득권과 이에 대한 저항이라는 구도에서 벗어나는 일상의 폭력을 사소하게 여기거나, 심지어는 외면하는 모습도 우린 자주 봐왔다.
영화는 ‘을’들 안에서도 저마다의 위계가 발생하며, 소속이나 집단 정체성과 무관하게 모든 관계 속에서 성찰하는 자세가 없으면 을들도 같은 을이나 병을 향한 무비판적인 폭력에 가담한다는 점을 보여준다. 여섯 편 중 한 편인 ‘당신이 사는 곳은 당신이 누구인지를 말해줍니다?’가 이 문제를 정면에서 마주하는 작품이다.
을 정체성을 가진 인물이 갑 정체성으로 뒤바뀔 때, 손쉽게 차별에 동참하는 모습을 비추면서 자신의 처지로부터 공감 능력을 확장하지 못하는 우리 시민 사회의 한계를 드러낸다. 이를 통해 을에 대한 구원은 ‘정치적 올바름’의 담론만으론 충분치 않으며, 실은 공감 능력의 결여가 핵심 문제임을 드러낸다. 바람직한 공동체에 대한 상상이 없는 담론은 타인을 품지 못하는 개개인의 권익 보호에 그치며 공허해진다.
소비자 주의를 정면에서 풍자한 ‘진정성 실전편’ 역시 시민 없는 진정성이란 무엇인지 묻는다. 영화가 농담과 냉소를 위태롭게 오가는 가운데 희망도 비관도 할 수 없는 우리 사회의 처지가 남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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