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의 불가사리를 위하여[왕은철의 스토리와 치유]〈296〉

  • 동아일보
  • 입력 2023년 5월 24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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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만 마리의 불가사리가 폭풍우에 떠밀려 해변으로 올라와 있다. 물 없이는 살 수 없는 불가사리들이니 이제 영락없이 모래사장에서 죽게 생겼다. 그런데 해변을 산책하던 어린 소녀가 불가사리 하나를 집어 바다에 던진다. 어떤 노인이 그 모습을 보고 말한다. “얘야, 이 해변엔 수십만은 못 되더라도 수만 마리나 되는 불가사리가 널려 있단다. 네가 몇 마리 구해 준다고 별 차이가 있겠니?” 소녀는 또 하나를 집어 바다에 던지며 말한다. “쟤한테는 큰 차이가 있죠.”

17년 동안 승려였다가 환속해 진리 전파에 힘쓴 스웨덴인 비오른 나티코 린데블라드가 들려주는 이야기다. 수만 마리 중 몇 마리를 살린다고 무슨 차이가 있느냐고 묻는 노인은 압도적인 현실 앞에서 쉽게 체념하고 마는 우리를 닮았다. 노인의 말은 현실적이다. 개인의 힘으로는 대세를 바꾸는 것이 불가능한 현실은 엄연히 존재하고, 그러한 상황에서 체념하게 되는 것은 당연한지 모른다. 그러나 소녀의 말도 현실적이긴 마찬가지다. 노인처럼 세상을 바라보면 소녀의 행동이 미미해 보일지 모르지만, 목숨을 건지는 몇몇 불가사리에게는 그야말로 엄청난 일이다. 미미하지만 그러한 몸짓 하나하나가 모이다 보면 모두를 살릴 수 있을지도 모른다. 비관하고 회의하고 냉소할 게 아니라 작은 것에도 의미를 부여하자는 것이다. 안쓰러운 마음이 일면 이것저것 따지지 말고 우선 행동으로 옮기자는 것이다.

그러한 마음을 조동화 시인은 이렇게 노래한다. “나 하나 꽃피어/풀밭이 달라지겠냐고 말하지 말아라/네가 꽃피고 내가 꽃피면/결국 풀밭이 온통 꽃밭이 되는 것 아니겠느냐.” 하나하나의 꽃들이 모여 꽃밭이 되는 법이니 나와 너부터, 너와 나부터 노력하자는 거다. 나 하나 꽃피고 너 하나 노력한다고 세상이 달라지겠느냐고 말하지 말라는 거다. 린데블라드가 전하는 이야기는 니체가 “손님 중에서 가장 이상한 손님”이라고 말한 허무주의를 물리치는 지혜를 감동적으로 펼쳐 보인다.

#불가사리#조동화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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