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원 참사가 일어난 지 200일이 지났다. 대구 지하철 참사는 올해가 20주년이고, 세월호 참사는 내년 10주기를 앞두고 있다. 황망하고 가슴 아픈 죽음들 앞에 많은 이들이 슬퍼하며, 다시는 이런 재난이 없게 해달라고 손 모아 빌었지만, 과연 우리 사회가 그 바람만큼 변해 왔는가 생각하면 회의적이다. 어찌 보면 그 참사들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한편에서는 따지거나 묻지 말고 어서 빨리 잊고 제자리로 돌아가라고 말하지만, 반대편에서는 그 영혼들이 편히 쉬기 위해서라도 우리 남은 자들이 해결해야 할 문제가 남아 있다고 가슴을 치며 울부짖는다.
삶의 반대말은 죽음일까? 우리는 삶의 맨 마지막에 죽음이 위치하며, 죽음 뒤에는 삶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배워 왔다. 그러나 지난 참사의 경험을 통해서, 우리는 죽음 뒤에도 계속되는 삶의 모습을 본다. 그 삶은 당사자 육신의 삶은 아니지만, 남은 자들과의 관계 속에 잔존하는 사회적 삶이다. 사진 속에서, 기념행사 속에서, 그리고 그때 그대로의 모습으로 고스란히 남아 있는 아이의 방과 물품 속에서, 아이는 여전히 살아 있다. 대화의 주제로 떠오르고, 집회의 내용이 되기도 하며, 기억의 소중한 자원으로 나타난다. 따라서 죽음은 오늘날 의학적으로 판결되지만, 호흡의 정지나 뇌 기능의 소멸로 간단히 설명되기는 어렵다. 심장 정지 혹은 흉부의 압박이라는 법의학적 사인은 관리 당국의 보고서 작성이나 통계 기록에 의미 있을지 모르지만, 남은 가족이나 친구들에게 죽음을 설명해 줄 수 없다.
인간이 사회적 동물이라는 것은 집단적 협력 없이 개인이 생존할 수 없다는 사실을 뜻하기도 하지만, 우리 각자의 삶이 시공간적으로 다른 이들과 연결되어 있음을 의미한다. 우리의 관계성은 산 자들뿐 아니라 죽은 자들을 포함한다. 그렇기에 얼굴 한번 대면한 적이 없는 조상의 무덤에 술잔을 기울이는 것이며, 이름 한번 불러본 적 없는 낯선 사람들의 죽음 앞에 포스트잇을 붙이며 애통해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삶의 반대말은 죽음이 아니다. 죽음은 여전히 많은 이들에게 살아 숨 쉬는 삶으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삶의 반대말은 무엇일까? 그것은 소멸이다. 망각이다. 존재에 대한 사회적 상실, 존재에 대해 우리가 잊어버리는 것이야말로 삶의 반대말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만일 삶의 반대말이 소멸이라면, 망각이라면, 어째서 유가족이 죽은 자들을 잊지 않기 위해 애쓰는지를 조금은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그들은 한 명 한 명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존재, 사랑하는 가족 또는 친구였던 사람들이었다. 관계성으로 얽힌 존재로서, 죽은 자들의 삶은 동시에 남은 자들의 삶이다. 그렇기에 유가족들은 아직 죽은 자들의 삶을 붙잡는다. 기억 능력이 허락하는 한, 죽은 자들은 남은 자들의 삶 속에서 계속 살아 숨 쉴 것이다. 그렇다면 육신의 생명이 멈추었다고, 그들을 단숨에 사회 속에서 소멸시켜 버리라고, 망각하라고 말하는 것은 너무나 잔인한 요구이지 않을까? 오히려 우리가 참사 피해자들을 보듬고자 한다면, 죽은 자들의 남은 사회적 삶을 함께 이야기하고 나누어주는 것이 필요하지 않을까? 그들은 여전히 우리에게 살아 있다고, 우리도 아직 잊지 않았다고 말해주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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