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적 예술 작품이 국내에서는 ‘검은돈’의 창구로 애용된 일이 적지 않다. 각종 비리 사건이 불거질 때마다 화제에 오르내리는 유명 작품이 한둘 아니다. 10년 전 검찰이 전두환 전 대통령 일가를 압수수색했을 때는 박물관 하나 차릴 정도의 ‘대어’들이 쏟아졌다. 미술품은 누가 얼마에 샀는지 알기 어렵고, 과세 대상에서도 비켜나 있어 범죄 수익 은닉이나 비자금 조성, 편법 증여 등에 안성맞춤으로 여겨져 온 탓이다. 최근엔 고가의 명품이나 시계가 이런 목록에 첨가되는 추세다.
▷SG증권발(發) 주가 폭락 사태의 몸통인 라덕연 H투자컨설팅업체 대표도 이 같은 행태를 흉내 냈다. 보도에 따르면 라덕연 일당은 서울 강남의 한 갤러리에서 투자자들에게 그림을 구매하도록 하고, 실제 그림은 보내지 않는 방식으로 투자 수수료를 챙긴 것으로 알려졌다. 이들은 삼천리·다우데이타 등 8개 상장기업의 주가를 불법 시세 조종으로 띄워 7305억 원의 부당 이득을 벌어들였고, 이 중 수수료 명목으로 1944억 원을 챙긴 혐의를 받고 있다.
▷검찰은 ‘자금 세탁소’로 활용된 이 갤러리를 압수수색해 라 대표 일당이 소유한 유명 그림 수십 점을 확보했다고 한다. ‘물방울 화가’로 유명한 김창열 화백의 작품부터 미국 현대미술의 거장 앨릭스 카츠의 그림, 영국 출신의 팝아트 작가 데이비드 호크니의 작품이 포함됐다. 호크니는 2018년 크리스티 뉴욕 경매에서 ‘예술가의 초상’이 생존 작가 작품으로는 최고가(9031만 달러)에 낙찰되며 ‘가장 비싼 화가’ 타이틀을 얻었는데, 검찰이 이번에 압수한 호크니 작품들은 포장도 뜯지 않은 상태였다고 한다.
▷유명 미술품 외에 검찰이 압수한 라 대표의 명품 시계도 여럿이다. 바쉐론 콘스탄틴, 파텍 필립 등 시가 2억∼7억 원을 호가하는 스위스 하이엔드 브랜드 시계들이다. 라 대표 회사 직원이 보관하던 에르메스 체스판, 루이비통 테이블, 롤스로이스 차량 등도 함께 압수된 것으로 전해졌다. 라 대표 일당이 수수료 등 범죄 수익으로 고가의 미술품과 사치품을 대거 사들였을 가능성이 높다.
▷라덕연 일당은 단기간에 주가를 띄워 한탕 하고 튀는 식의 작전이 얼마나 더 교묘해지고 과감해졌는지 보여준다. 일반적 주가 조작 수법에서 진화해 다단계 방식으로 투자 규모를 키웠고 공매도가 안 되는 종목, 차액결제거래(CFD)를 통한 거래 등 법의 허점을 파고들었다. 공개된 용의자나 다름없었던 라 대표는 방송에 나와 스스로를 피해자라고 주장하는 뻔뻔함을 보이다가 최근에야 구속됐다. 세계 자본시장에서 전례를 찾기 힘든 일들이다. 민낯을 드러낸 한국 자본시장을 재정화하는 작업이 시급한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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