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에는 유명 정치인이나 자국이 자랑하는 인물의 이름을 내건 공항이 꽤 많다. 한국에는 사람의 이름을 딴 공항은 없다. 다만 공항 유치에 공이 큰 정치인의 이름을 별칭으로 부르기도 한다. ‘한화갑 공항(무안)’ ‘김중권 공항(울진)’ ‘유학성 공항(예천)’ 등이다. 칭송의 의미는 아니다. 수요를 면밀히 따지기보다는 정치 논리를 앞세워 추진했던 공항의 끝은 그리 아름답지 않았다.
▷15대 총선을 앞둔 1995년 말 건설 계획이 확정돼 ‘김영삼 공항’으로도 불리는 강원 양양국제공항도 마찬가지다. 유일한 노선이었던 양양∼제주 노선이 20일 중단되면서 여객청사의 불이 꺼졌다. 이 공항을 모(母)기지로 하는 저비용항공사(LCC) 플라이강원은 경영난으로 법원에 기업회생 신청을 했다. 2002년 4월 국비 3500억 원을 투입해 문을 연 양양공항은 여객 수요 부족으로 애를 먹어왔다. 2008년 11월부터 9개월 동안 비행기가 한 대도 뜨지 않아 ‘유령 공항’으로 불리기도 했다.
▷전남 무안국제공항 이용객은 2019년 90만 명에서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등의 영향으로 지난해 4만6000명까지 급감했다. 국제공항이지만 정기 국제노선은 없다. 빈 활주로에서 고추를 말리는 사진이 있다며 ‘고추 공항’으로도 불렸는데 그건 사실이 아니다. 수요가 없어 계획이 중단되거나 문을 닫은 공항도 있다. 1300억 원을 들여 지은 경북 울진공항은 취항하려는 항공사가 없어 개항을 못 하다 현재는 비행훈련원으로 쓰고 있다. 2003년 공사가 중단됐다 20년 만인 올해 초 공항 계획이 공식 폐지된 전북 김제공항은 그동안 주민들이 공항 부지를 빌려 배추, 고구마 농사를 지어왔다.
▷2017년부터 지난해 8월까지 김포 김해 제주 대구를 제외한 지방 공항 10곳의 누적 손실은 4823억 원에 이른다. 이 기간 이들 10개 공항의 평균 활주로 이용률은 4.5%에 불과했다. 그런데도 전국 곳곳에서 신공항의 꿈은 날개를 펴고 있다. 가덕도, 대구경북, 새만금, 흑산도, 울릉도, 서산 등 10개의 공항이 추진 중이다. 항공 수요와 지역균형을 고려할 때 필요한 공항도 있다. 하지만 국토가 좁다 보니 한정적 여객 수요를 놓고 인근 공항끼리 다퉈야 하는 상황이라 중복 투자가 우려되는 게 사실이다.
▷프랑스에서는 기차로 2시간 30분 안에 이동할 수 있는 구간은 항공기 이용을 금지하는 내용의 ‘기후와 복원 법안’이 23일 발효됐다. 온실가스를 많이 내뿜는 항공기 사용을 줄이자는 취지다. 고속도로와 고속철도가 그물망처럼 발달한 한국에서 공항이 이렇게 많이 필요한지 생각해볼 일이다. 일단 지어놓으면 수요가 생기겠거니 생각할 순 없다. 소중한 인프라인 공항이 ‘유령 공항’이니 ‘배추밭 공항’이니 하는 조롱 섞인 이름으로 불리는 일은 더는 없어야겠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