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 미국에서 한국 통상교섭본부장과 만난 중국의 통상담당 장관이 ‘양측은 반도체 산업망과 공급망 영역에서 대화와 협력을 강화하는 데 동의했다’는 내용의 보도 자료를 배포했다. 하지만 한국 정부 발표에는 반도체 관련 사항이 빠졌고, ‘교역투자 안정화를 논의했다’는 내용만 포함됐다. 미국 주도의 반도체 제재에 한국이 동참하지 않기를 바라는 중국 측의 일방적 발표에 한국 측이 에둘러서 이를 부인한 셈이다.
이번 일은 조여드는 대중 반도체 포위망에 대한 중국의 초조함을 드러낸 사건이다. 중국은 최근 메모리반도체 세계 3위 미국 마이크론 제품의 중국 판매를 중단시켰다. 마이크론 세계 매출의 11%를 차단함으로써 미국의 제재를 반격하는 한편 세계 1, 2위 삼성전자, SK하이닉스를 통해 자국 산업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을 것으로 판단했을 것이다. 중국은 양츠메모리(YMTC) 등의 기술력을 키워 공백을 메울 계획이지만 아직은 품질 면에서 한계가 분명하다.
하지만 미국 측이 “마이크론의 공백을 한국 반도체 기업이 메워선 안 된다”며 한국을 압박하는 바람에 중국의 계산이 틀어지고 있다. 한국 기업들로선 중국 내 마이크론의 매출을 흡수하면 단기적으로 이득이지만 반도체 설계기술·장비 세계 1위인 미국은 물론이고 이미 제재에 동참한 소재·장비 강국 일본, 네덜란드와의 관계까지 나빠질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과 중국의 적극적인 반도체 협력은 쉽지 않다. 국내 반도체 업계도 “중국과의 협력은 결국 앞서 있는 한국의 기술을 내주는 것”이라는 부정적 반응이다. 중국 공장 설비 업그레이드에 미국 허가가 필요하고, 제재 조건을 조금이라도 누그러뜨리려고 애쓰는 와중에 성급한 중국과의 협력 강화 논의는 득보다 실이 훨씬 클 수 있다.
한국 반도체를 둘러싼 미중의 압박은 갈수록 강해지고 있다. 메모리반도체 초격차 기술력은 두 나라가 한국에 유화 제스처를 보내는 이유이자, 한국이 보유한 최강의 무기이고 지렛대이기도 하다. 양국의 페이스에 말려들지 않으면서, 해외 시장을 지켜내기 위해 머리카락 1만분의 1 굵기 반도체 회로를 다루듯 섬세한 외교·안보 정책이 필요한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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