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포국, 사물국… 1900년 전 남해의 무역 강소국들[이한상의 비밀의 열쇠]

  • 동아일보
  • 입력 2023년 5월 30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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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한상 대전대 역사문화학전공 교수
이한상 대전대 역사문화학전공 교수
리아스식 해안 지형의 우리나라 남해안은 경관이 수려하고 해산물이 풍부하다. 또한 파도가 잔잔해 오랫동안 해상교통로 역할을 수행했다. 조선의 조운선이 그곳을 거쳐 한양으로 향했고 임진왜란 때에는 이순신 장군이 그곳을 필사적으로 지켰기에 조선을 위기에서 구할 수 있었다. 남해안 항로는 선사시대에 개척되어 삼국시대에 각광받았는데, 소가야가 그곳을 주름잡았다. 소가야 휘하의 여러 세력들은 저마다 포구에 자리 잡고 국제 교역에 참여하며 성장했다.

그러나 소가야라는 국명은 알려져 있지만 그 나라가 언제쯤 무엇을 배경으로 성장하였다가 왜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졌는지는 지금도 여전히 수수께끼로 남아 있다. 다만 간간이 발굴된 유적과 유물만이 그 옛날 소가야의 영화를 보여줄 뿐이다.

국제 무역항으로 발달한 ‘늑도’
남해안 항로에 국제 교역 중심지가 세워진 것은 소가야가 등장하기 훨씬 전인 기원전 2세기 무렵이다. 1979년 부산대박물관 연구원들이 삼천포(현 사천) 앞 작은 섬, 늑도를 찾았다가 우연히 발견한 일군의 토기 조각들이 그러한 사실 해명의 단서를 제공했다.

경남 사천 앞바다 늑도 유적지에서 발굴된 일본 야요이계 토기. 기원전 2세기 무렵 국제무역으로 유명했던 늑도에는 여러 나라 상인들이 장기간 거주했음을 보여주는 유물들이 출토됐다. 국립진주박물관 제공
경남 사천 앞바다 늑도 유적지에서 발굴된 일본 야요이계 토기. 기원전 2세기 무렵 국제무역으로 유명했던 늑도에는 여러 나라 상인들이 장기간 거주했음을 보여주는 유물들이 출토됐다. 국립진주박물관 제공
1980년 이래 금년까지 단속적으로 실시된 발굴에서 300여 동의 건물지, 200기에 가까운 무덤과 함께 제철 시설이 확인됐으며 수만 점의 유물이 출토됐다. 그 가운데는 현지에서 만든 토기가 주종을 이루지만 중국 한(漢)나라 양식 토기와 청동 유물, 일본 야요이(彌生) 시대 토기가 다량 포함되어 있어 글로벌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학계에선 이 섬 전체가 하나의 거대한 유적이며 기원전 2세기∼기원전 1세기 동아시아 국제 교역의 중심지들 가운데 하나일 것으로 추정한다. 근래 늑도에서 발굴된 인골들 가운데 일본 야요이인의 인골이 포함돼 있다는 연구 결과가 나와 주목된다.

현재의 늑도항은 물고기잡이 배들이 드나드는 평범한 어촌이지만 그 옛날엔 연안을 따라 항해하던 여러 나라 선박들이 기항하던 곳이었고 동아시아 각지에서 온 상인들이 함께 어울리며 자신들이 가져온 물품을 사고팔던 무역항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늑도에서는 기원후의 유적과 유물이 거의 확인되지 않는다. 그 이유가 무엇인지 분명치 않으나 아마도 인접한 육지의 포구들이 번성하면서 교역 거점으로서의 지위를 넘겨주었기 때문일 가능성이 있다.

남해의 8개 소국 ‘포상팔국’ 연맹
경남 창원시 마산합포구 현동고분군에서 출토된 배 모양의 토기. 현동고분군은 서기 1세기 무렵 남해안 골포국의 후예들 묘역으로 추정되며, 이 토기는 제사 의례에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국립김해박물관 제공
경남 창원시 마산합포구 현동고분군에서 출토된 배 모양의 토기. 현동고분군은 서기 1세기 무렵 남해안 골포국의 후예들 묘역으로 추정되며, 이 토기는 제사 의례에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국립김해박물관 제공
서기 1세기 무렵, 경남 남해안 여러 곳에서는 ‘○○국’이라 불린 자그마한 나라들이 본격적으로 성장했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의 찬자는 그 나라들을 포상팔국(浦上八國), 즉 ‘포구에 자리한 여덟 나라’라고 통칭했다. 그 가운데 골포국(현 창원), 고자국(현 고성), 사물국(현 사천) 등이 포함된다. 그 나라들은 공동의 이익을 추구하려 느슨한 연맹을 이루었고 3세기 초에는 자신들의 이익에 반하였기 때문인지 맹주 격인 구야국(현 김해)을 공격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그러한 기록의 실체를 해명할 수 있는 유적이나 유물은 발굴된 바 없다. 다만 포상팔국의 고지에서 5세기 이후 축조된 가야 무덤들이 속속 발굴되고 있다. 포상팔국의 후예들 가운데 일부가 가야 후기에도 여전히 남해안 항로에서 맹활약하였음에 틀림없다. 아마도 삼국유사에 기록된 소가야가 그들이 만든 나라였을 것이다. 소가야의 실체를 가장 잘 보여주는 유적이 고성 송학동 고분군이다.

이 고분군에 대한 발굴의 첫 삽을 뜬 것은 1999년 가을이지만 이 고분군이 학계의 주목을 끈 것은 1983년부터이다. 한 연구자가 송학동 1호분이 일본 고훈 시대 특유의 무덤 양식인 전방후원분이라고 주장하였던 것이다. 논쟁이 시작된 지 16년 만에 해당 무덤을 발굴한 결과, 전방후원분이 아니었고 여러 기의 무덤이 연접된 것임이 밝혀졌다. 가장 큰 석곽은 길이가 8.25m나 돼 소가야의 왕묘로 보아 무리가 없다. 도굴당했는데도 무덤 곳곳에서는 유물이 수백 점 쏟아졌다. 소가야 토기가 가장 많았지만 대가야 토기, 백제 청동 그릇, 신라 말갖춤뿐만 아니라 바다 건너 왜에서 들여온 토기도 다수 섞여 있었다.

여타 무덤들에 대한 발굴에서도 비슷한 양상이 확인됐다. 소가야 왕족 무덤 속에는 다양한 계보를 가진 유물이 함께 묻힌 것이다. 고령의 대가야보다 작았기에 소가야라 불린 나라. 그 나라가 역사에 이름을 남길 수 있었던 것은 바로 무덤 속 다양한 국적의 유물이 보여주듯 바닷길을 장악하고 국제 교역을 주도하였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허무하게 신라에 복속된 소가야
경남 고성군 송학동 1호분에서 출토된 말띠드리개의 한 종류. 소가야가 주변국에서 수입했거나 주변국이 우호 관계 유지를 위해 제공한 것으로 추정된다. 동아대박물관 제공
경남 고성군 송학동 1호분에서 출토된 말띠드리개의 한 종류. 소가야가 주변국에서 수입했거나 주변국이 우호 관계 유지를 위해 제공한 것으로 추정된다. 동아대박물관 제공
소가야의 등장 시점은 분명치 않다. 다만 소가야 양식 토기가 만들어져 널리 유통되고 곳곳에 거대한 무덤이 축조되는 5세기 이후일 공산이 크다. 학계에선 소가야의 경역을 고성과 사천, 진주, 산청으로 보면서 같은 시기 신라나 백제와 달리 크고 작은 세력이 느슨한 연맹을 이뤘을 것으로 추정한다.

소가야의 성장에는 5세기 전반 이래 한 세기 이상 지속된 국제적 평화가 한몫을 톡톡히 했다. 433년 숙적 백제와 신라가 동맹을 맺자 백제의 오랜 우방 가야에도 평화의 시대가 도래했다. 그에 따라 백제, 가야, 신라, 왜를 잇는 남해안 항로의 활용도가 높아졌다.

그런데, 6세기 중엽 예기치 못한 변수가 생겼다. 551년 한강 유역 영유권을 둘러싸고 백제와 신라가 갈등을 벌이게 되면서 남해안 항로가 불안정해진 것이다. 설상가상 가야는 554년 벌어진 관산성 전투에서 백제를 지원하였지만 그 전투에서 백제가 신라에 대패함에 따라 가야는 설 자리를 잃고 말았다. 가야를 향한 신라의 서진은 다욱 가속화되었고 그 과정에서 소가야는 힘 한번 제대로 써보지 못한 채 신라에 복속됐다.

이처럼 소가야 역사는 드라마틱하지만 연구의 부족으로 인해 많은 부분이 베일에 가려져 있다. 소가야가 포상팔국을 어떻게 계승하였는지, 소가야를 구성한 세력들은 어떠했고, 그들은 왜 스스로의 힘으로 나라를 지켜내지 못했는지 등 앞으로 밝혀야 할 과제가 수두룩하다. 머지않은 장래에 하나하나 차례로 밝혀지길 바란다.

#골포국#사물국#무역 강소국#늑도#포상팔국#소가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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