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란체스코 로시 감독의 ‘휴전’(1996년)은 아우슈비츠 생존자 프리모 레비의 회고록 ‘휴전’을 바탕으로 만든 영화다. 수용소에서 풀려났어도 고국인 이탈리아로 돌아가지 못하고 8개월 동안이나 러시아, 폴란드, 우크라이나, 벨라루스를 떠돌던 유대인들의 고단한 여정이 펼쳐진다. 그들에게는 전쟁이 끝났어도 끝난 게 아니었다. 그래서 ‘휴전’이다.
잠깐이지만 아주 서글픈 장면이 나온다. 다른 나라를 떠돌던 유대인들은 어느 날 송아지를 몰래 잡고 고기를 배분하기 시작한다. 그런데 한 남자가 어떤 여자를 밀어낸다. “당신은 나치와 밥을 같이 먹었잖아. 꺼져. 우리한테서 떨어져.” 그녀가 수용소에서 나치 군인들의 성적 노리개였던 일을 문제 삼은 것이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타자에 대한 야만적 폭력의 역사에서 여자들이 성적으로 유린당하지 않은 경우는 거의 없었다. 모든 식민 역사는 여자들에 대한 폭력의 역사 그 자체였다. 그들은 연민과 위로의 대상이어야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그들은 동족한테서 오염된 존재로 취급받고 스스로를 창피하게 생각하도록 강요받았다. 그래서 숨을 죽이고 숨어 살아야 했다. 홀로코스트 피해자들도 예외가 아니었던 모양이다. 영화에서 유대인 남자가 유대인 여자를 밀쳐낸 것은 그래서다. 그런데 그때 놀라운 일이 벌어진다. 레비가 여자를 감싸며 이렇게 말한다.
“아우슈비츠에서 그들이 우리에게 했던 최악의 짓은 우리에게 빵을 주지 않은 것도, 우리를 고문한 것도, 우리를 죽인 것도 아니었소. 최악의 짓은 우리의 영혼과 연민의 능력을 으깨고 그 빈자리를 증오로 채웠다는 거요, 심지어 서로를 증오하도록.”
그러니 상처받은 사람들끼리 서로 미워하지 말고 연민의 눈으로 보자는 말이다. 로시 감독이 원작을 영화의 서사에 맞게 변형했기에 실제로 그런 일이 있었는지 확실하진 않지만, 여하튼 그 장면은 트라우마로 인해 상실한 인간성과 연민의 마음을 되살리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조용히 설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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