끊겨버린 전통 배의 명맥[김창일의 갯마을 탐구]〈96〉

  • 동아일보
  • 입력 2023년 6월 1일 03시 00분


김창일 국립민속박물관 학예연구사
김창일 국립민속박물관 학예연구사
조선시대에 많은 사람이 표류해 죽었고, 일부는 귀환해 이야기를 남겼다. 특히 제주와 뭍을 오가던 배가 난파되거나 표류하는 경우가 많았다. 10여 편의 표류기가 수록된 ‘지영록’(2018년 보물 지정) 번역서 편찬 업무를 담당할 때 궁금한 점이 있었다. 지영록에 ‘김대황표해일록’이라는 표류기가 있는데 제주에서 24명을 태운 배가 뭍으로 가다가 추자도 인근에서 북동풍을 만나 베트남까지 표류한 후 귀환한 내용이다. 어떤 배였기에 며칠간의 폭풍우에도 침몰하지 않고 31일 동안 망망대해를 떠다니다가 베트남 호이안에 닿을 수 있었을까.

배에 관한 상세한 기록은 없지만 덕판배로 추정할 수 있다. 뱃머리에 두껍고 넓은 나무판인 덕판을 대서 제주 해안의 날카로운 암초에 부딪혀도 견디는 내구성을 지닌 배다. 날렵하지는 않았지만, 제주에 적합한 전통 배였다. 1996년 제주도 승격 50주년 기념 사업으로 ‘덕판배 복원 사업’을 진행해 길이 9m, 폭 4.5m 규모로 복원한 적이 있다. 이미 명맥이 끊긴 배를 복원했으므로 논란이 일었다. 제작 기술이 단절된 상태였고, 덕판배 제작에 관한 공식 기록조차 없었기에 제대로 만들어졌는지를 누구도 평가할 수 없었다.

전통 배 제작 기술 전수가 이뤄지지 못한 근본적인 원인은 조선 후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조운제도 폐지(1894년), 삼도수군통제영과 각 도 수영 혁파로 수군이 해산됨에 따라 조운선과 군선의 맥이 끊겼다. 조선 후기 국력의 쇠락으로 조선 산업은 몰락의 길을 걸었다. 1910년대 이후에는 개량형 어선 보급 정책이 시작돼 일본식 어선이 점진적으로 증가했다. 일본 정부는 어획량 확대를 위해 도입한 안강망, 건착망, 석조망 등의 일본식 어구 및 어법에 적합한 어선을 늘리려 했다. 명목상으로는 조선 재래식 어선을 개선한다는 취지였으나, 어족 자원의 대량 확보를 위한 방책이었다. 일본인 수산업자들과는 달리 우리 어민들은 영세했다. 고가의 일본식 어선 구입이 어려워 한동안 재래식 배가 유지됐으나 오래가지는 않았다. 1930년대에 조선총독부의 입맛에 맞게 표준형 선박 건조를 유도하면서 전통 어선은 사라져 갔다.

강진에서 900섬을 싣고 오던 조운선이 조난된 내용이 효종실록(1661년)에 수록돼 있다. 숙종실록(1728년)에는 1711년 파주에서 조세미 1000여 섬을 싣고 광흥창에 도착한 내용이 있다. 쌀 기준으로 1섬을 144㎏(시대와 곡물에 따라 편차가 있음)으로 환산하면 조운선의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군선의 종류는 대선, 중대선, 중선, 병선, 쾌선, 맹선, 별선, 추왜별선 등 13종, 829척에 이른다고 세종실록지리지(1454년)에 기록돼 있다. 상당한 규모의 조운선과 다양한 군선을 운용했음을 알 수 있다. 쌍돛을 단 당두리(길이 약 15m, 너비 4.5m)와 하나의 돛을 단 야거리(길이 4m, 너비 2m) 등 수많은 어선은 한반도 바다에서 물고기를 잡았다. 조운선과 군선 제작 기술은 명맥이 끊겼고, 어선은 멸치잡이 배인 통영의 통구민배와 신안 가거도배 정도가 1960년대 후반까지 전통 어선의 흔적을 지니고 있었다.

한국 조선 산업은 2023년 1분기(1∼3월) 수주 점유율 40% 확보로 세계 1위다. 한국에서 만든 배가 세계의 바다 구석구석을 누비고 있다. 전통 배의 끊긴 명맥이 더욱 아쉽게 느껴진다.

#전통 배의 명맥#조운제도 폐지#한국 조선 산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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