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25일 한은 금융통화위원회 관련 유튜브 영상에 한동안 눈길이 머물렀다. 이 영상엔 이창용 한은 총재가 금통위 직후 기자간담회에서 기준금리를 동결한 배경과 이유를 설명하다 쏟아낸 발언이 담겨 있었다.
이날 한 기자는 “한국 경제의 저성장 국면이 장기화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정부의 연금·노동 개혁 등 구조 개혁 추진 상황에 대해선 어떻게 평가하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이 총재는 “우리는 이미 장기 저성장 구조에 와 있다”며 작심한 듯 말을 이어갔다.
그는 “노동·연금·교육을 포함해 구조 개혁이 필요하다. 우리의 문제는 개혁해야 한다는 것을 알지만 이해 당사자 간 사회적 타협이 어려워 진척이 안 된다는 것”이라고 꼬집었다. 이어 “우리 경제가 앞으로 잘되느냐는 구조 개혁, 이해 당사자들이 어떻게 사회적으로 타협해 나갈지 해결하는 게 가장 중요하다”며 “거기서 해결하지 못하는 것을 재정·통화 정책으로 해결하라고 하면 나라가 망가지는 지름길”이라고 지적했다.
날이 서 있었지만 명확한 발언이었다. 무엇보다 그의 발언엔 ‘도대체 왜 우리는 사회적 타협을 도출해내지 못하는가’에 대한 안타까움이 묻어 있었다. 사회적 타협과 구조 개혁에 대한 간절한 바람도 녹아 있었다.
한국은 이 총재의 진단처럼 사회적 타협의 경험이 거의 없는 사회다. 1998년 2월 외환위기 당시 양대 노총이 참여해 정리해고 법제화 등에 합의한 ‘경제위기 극복을 위한 사회협약’이 사실상 유일한 ‘대타협’이다. 이 협약은 외환위기 극복에 큰 힘이 됐지만, 1999년 내부 반발에 직면한 민노총이 노사정위원회(현 경제사회노동위원회)를 탈퇴하면서 빛이 바랬다. 2015년 박근혜 정부는 저성과자 해고와 고용안전망 확충을 맞바꾸는 9·15협약을 도출했지만, 정부의 강경 노선에 반발한 한국노총이 파기를 선언하면서 휴지 조각이 됐다.
거야(巨野)의 벽에 막힌 윤석열 정부는 사회적 타협을 거의 포기한 모습이다. 정부와 전문가그룹이 52시간제·중대재해처벌법 개편 등을 추진 중이지만 입법 없는 노동 개혁은 공허한 메아리로 들린다. 여기에 7일 한국노총은 간부 구속에 반발해 경사노위 불참을 선언했다. 연금 문제도 마찬가지다. 윤석열 대통령은 대선 후보 시절 국민연금 개혁을 공언했으나 정부는 국회에 논의를 떠넘긴 채 지금까지 정부안조차 만들지 않았다.
사회적 타협은 국민의 일상에도 꼭 필요하다. 지하철 등 대중교통 만성 적자를 해소하고 요금을 적게 올리려면 고령층 무임승차 제도를 개편해야 한다. 서울시는 이를 공론화해 세대 간 타협을 이끌어보려 했다. 하지만 정부는 “지자체가 해결할 문제”라며 뒷짐만 지고 있다. 내년 총선을 앞둔 국회 역시 아무 관심이 없다.
네덜란드와 아일랜드 등 유럽의 강소국들은 일찌감치 사회적 타협을 통해 구조 개혁에 성공하고 다음 세대를 위한 일자리를 만들었다. 우리 사회는 지금 사회적 타협을 위해 어떤 노력을 하고 있는가. 이 총재의 진심 어린 제안을 모두가 깊이 새겨들을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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