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은 꽃나무를 뽑아낸 일뿐인데 그리고 꽃나무가 있던 자리를 바라본 일뿐인데 목이 말라 사이다를 한 컵 마시고는 다시 그 자리를 바라본 일뿐인데 잘못 꾼 꿈이 있었나?
인젠 꽃이름도 잘 생각나지 않는 잔상들 지나가던 바람이 잠시 손금을 펴보던 모습이었을 뿐인데
인제는 다시 안 올 길이었긴 하여도 그런 길이었긴 하여도
이런 날은 아픔이 낫는 것도 섭섭하겠네.
―장석남(1965∼ )
잠의 신 히프누스에게는 세 명의 아들이 있는데 이들은 모두 꿈의 신이 되었다. 첫째는 사람에 관한 꿈을 꾸게 만들고, 둘째는 동물에 관한 꿈을 꾸게 했으며, 막내는 무생물에 관한 꿈을 꾸게 했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꿈의 신이 겨우 셋일 리 없다. 우리에게는 사람이나 동물이 등장하지 않는 꿈도 있다. 우리에게는 밤의 꿈만 있는 것이 아니라 낮의 꿈도 있다. 되고 싶은 어떤 경지, 만들고 싶은 어떤 세상, 이루고 싶은 어떤 가치를 우리는 ‘꿈’이라고 부른다. 신들이 만드는 꿈은 잠든 때만 찾아오지만, 우리가 만드는 꿈은 사람을 잠들지 않게 만든다. 그것을 소중하게 끌어안지 않을 수 없다.
꿈꾸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마는 결국 꿈을 이루는 사람도 어디 있는지 모르겠다. 이 시에는 소중한 꿈이 다 시들어 그것을 버려야 했던 한 사람이 등장한다. 시는 잃어버린 꿈에 대해서 이제는 이름도 생각나지 않는 듯 이야기한다. 표면상의 말뜻은 그러하고, 말투도 덤덤한데 시의 뒷면은 전혀 다르게 읽힌다. 실상 이 시의 꿈은 너무 간절했던 길이고, 잊을 수 없는 소망이며, 고통스럽게 남아 있는 미련이다. 꿈 뺀 자리는 오래오래 아팠을 것이다.
이 세상 많은 사람이 꿈을 꺾고, 버리고, 지우면서 살아간다. 그래서인지 이 시의 정서는 낯설지 않다. 꿈은 사라지고 텅 빈 심장만 남은 시의 장면이 영 낯설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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