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상 초유의 경영 공백 사태를 겪고 있는 KT가 최고경영자(CEO) 자격 요건에서 정보통신기술(ICT) 전문성을 삭제하기로 했다. 2002년 민영화 이전부터 정관에 명시했던 CEO 자격 요건 중 ‘ICT 분야의 전문적 지식·경험’을 빼고 ‘산업 전문성’을 넣기로 한 것이다. KT는 30일 임시 주주총회를 열어 이 같은 정관 개정안을 의결할 방침이다.
KT 측은 통신을 넘어 금융, 미디어 등으로 그룹 사업이 확대된 데 따른 개정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하지만 ICT 업계 경력이 없어도 국내 대표 통신기업의 CEO가 될 수 있다는 뜻이어서 사실상 외부의 폭넓은 낙하산 인사 가능성을 열어둔 것 아니냐는 우려가 쏟아지고 있다. KT 안팎에선 벌써부터 ICT 경험이 없는 특정인을 앉히려는 포석이라는 말이 나온다.
지난해 말부터 이어져 온 KT CEO 인선 과정의 논란을 보면 이런 의구심을 갖기에 충분하다. 지난 정부에서 선임된 구현모 전 대표에 이어 3월 차기 CEO 후보자가 된 윤경림 내정자까지 여권의 노골적인 압박을 견디지 못하고 자진 사퇴했다. 특히 여권은 KT 이사회가 경선을 통해 추린 내부 출신 후보들을 ‘이권 카르텔’이라고 비난하고 검찰 수사를 거론하며 제동을 걸었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반복된 KT CEO에 대한 퇴진 압력과 검찰 수사가 현 정부에서 그대로 재연된 것이다.
이로 인해 주인 없는 소유분산형 기업인 KT는 석 달째 경영 공백 상태다. 정치권과 이사회의 대치로 사외이사들이 대거 사퇴해 KT 이사회엔 사외이사 1명만 남는 어처구니없는 일도 벌어졌다. 연매출 25조 원, 재계 서열 12위이자 외국인 주주 지분이 40%가 넘는 거대 통신기업에서 글로벌 스탠더드와는 거리가 먼 파행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글로벌 ICT 업계는 인공지능(AI), 로봇, 모빌리티 등이 결합된 혁신기술과 서비스를 두고 치열한 경합을 벌이고 있다. 초광대역, 초지능화가 가능한 6세대(6G) 통신을 선점하기 위한 경쟁도 시작됐다. 민영화 이후 20년째 이어진 ‘KT 수난사’가 일개 기업의 피해로 그치지 않고 미래산업 전반의 경쟁력 훼손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오는 이유다. 민간기업 대표 선임을 둘러싼 정치 외압을 그만둘 때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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