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정고시 출신 중앙부처 공무원 A 씨는 정부 내에서 소위 ‘잘나가는 부서들’의 요즘 분위기를 두 마디로 요약했다. 대통령 관심이 높은 정책을 다루거나, 주요 국정과제를 담당하는 곳을 피하려는 공무원들이 늘고 있다는 것이다. 윤석열 정부의 3대 개혁과제를 다루는 교육·노동·연금 담당 부서의 경우 이런 현상이 더 심하다고 한다. 젊은 공무원뿐 아니라 중간 간부들도 마찬가지라고 했다.
특히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달 “새로운 국정 기조에 맞추지 않고 애매한 스탠스(stance)를 취한다면 과감하게 인사 조치를 하라”고 경고한 뒤 이런 분위기가 더 심해지고 있다는 것이다. A 씨는 “힘든 곳에서 일하면 경력에 도움이 된다는 인식은 옛말이 됐다”며 “급여는 같은데 일만 고되고 삐끗하면 눈 밖에 날 수 있으니 대부분 피하고 보자는 생각”이라고 했다.
윤 대통령의 경고 직후 실제로 원전 등 에너지 정책을 담당하는 산업통상자원부 2차관이 교체됐다. 국토교통부, 행정안전부 등 고시 출신 차관을 대통령의 국정 철학을 잘 이해하는 대통령실 비서관들로 교체할 거란 관측도 나온다. 과거 정부에선 임기 1년 차에 주로 이뤄졌던 실장급 고위공무원에 대한 대대적인 물갈이가 뒤늦게 진행될 것이란 얘기도 있다.
특히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대응 당시 힘을 받았던 보건복지부는 최근 보건의료 정책을 총괄하는 실장급 인사가 대기발령 조치되면서 사기가 크게 꺾였다고 한다. 코로나19 외국인 생활시설 관련 감사가 진행될 것이란 얘기까지 나오면서 뒤숭숭한 분위기다. 한 공무원은 “과거에 적극 행정 하라고 강조하던 사안을 시간이 지나 이렇게 감사하면 어느 공무원이 제대로 일을 할 수 있겠느냐”고 했다.
‘공포 분위기’ 조성으로 공직사회 기강을 잡을 수 있을까. 전문가들은 실패할 가능성이 크다고 본다. 현 정부에 대한 과도한 코드 맞추기가 다음 정권에서 문제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공무원들이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전 정권 지우기를 경험한 공직사회이기에 조금만 바람이 불어도 몸을 잔뜩 웅크리거나 드러누울 공산이 크다. 한 여당 관계자도 “안 그래도 보신주의가 팽배한 공무원들인데 국회 권력이 여당에 있지 않은 상황에서 군기 잡기가 통할지 걱정”이라며 “현 집권 세력 앞에서 보이는 공무원들의 ‘위장 군기’의 뒷면에 ‘복지부동’이 자리 잡고 있다고 봐야 한다”고 했다.
영혼 없이 밥그릇만 챙기는 공무원들을 다잡아 국정 동력을 확보하려는 것은 옳은 방향이다. 하지만 호통과 채찍만으로는 공직사회의 마음을 얻기 어렵다. 오히려 국민에게 봉사할 준비가 돼 있는 ‘영혼 있는’ 공무원까지 등을 돌릴 수 있다. 공개적으로 ‘코드 맞추기’를 압박하기보다 적절한 권한을 부여하고 ‘실패할 기회’를 보장하며 일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줘야 한다. 공직사회를 적으로 돌리고 대통령실과 여당의 힘으로만 국정을 밀고 나가기엔 아직 임기가 너무 많이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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