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김재영]첫차 놓치면 더는 오지 않는 ‘대기업-정규직’ 버스

  • 동아일보
  • 입력 2023년 6월 12일 23시 48분


‘대기업-정규직’ 12% 그들만의 리그
‘동일노동 동일임금’ 개혁 시작해야

김재영 논설위원
김재영 논설위원
공부하라고 아이를 들들 볶던 ‘선배 부모’들이 이해되지 않았다. 자식 성공시켜서 뭘 얼마나 덕을 보겠다고…. 속물처럼 느껴졌다. 내 아이가 자라고서야 알게 됐다. 성공하라고 닦달한 게 아니라 실패하면 어쩌나 겁나는 거다. 대기업·정규직으로 상징되는 안정된 직장에 올라타지 못했을 때 펼쳐질 미래가 선하니 새벽부터 깨울 수밖에 없다. 첫차를 놓치면 버스는 더는 오지 않는다.

첫차가 떠나면 기회가 없는 것은 노동시장 이중구조의 벽이 공고하기 때문이다. 보호받는 대기업·정규직 12%와 불안한 중소기업·비정규직 88%로 나뉘어 있다. 격차는 갈수록 커진다. 고용노동부에 따르면 지난해 6월 기준으로 대기업(300인 이상) 정규직의 임금을 100이라고 하면 대기업 비정규직은 65.3, 중소기업(300인 미만) 정규직은 57.6, 중소기업 비정규직은 43.7에 그친다. 2부 리그에서 1부 리그로 승격할 수 있으면 그나마 괜찮지만 현실에선 바늘구멍이다. 2020년 중소기업에서 일했던 근로자 중 2.6%만이 이듬해 대기업으로 올라섰다.

정규직만 과보호하는 노동법과 대기업 노조의 무리한 요구는 이중구조의 벽을 갈수록 높고 두텁게 만들고 있다. 생산성을 초과하는 임금상승의 과실은 대기업 정규직에게만 돌아갔다. 한 번 정규직을 뽑으면 되돌릴 수 없기에 기업들은 새로운 사업에 대한 웬만한 확신이 없으면 쉽사리 정규직을 채용하려 들지 않는다. 버스를 탄 사람은 안주하고, 버스를 놓친 사람은 절망한다. 한국 경제의 경쟁력을 갉아먹는 주요 요인이다. 한국의 시간당 노동생산성은 주요 7개국(G7) 평균의 62% 수준에 그친다.

지난달 말 여당이 ‘동일노동 동일임금’의 원칙을 담은 근로기준법 개정안을 발의한 건 논의의 좋은 출발점이 될 수 있다. 정규직 여부나 근속 기간 등 고용 형태와 관계없이 같은 일을 하면 같은 임금을 지급해야 한다는 게 핵심이다. 노동계가 오랫동안 요구해온 내용이기도 하고, 야당도 원칙적으로 동의하고 있다.

물론 넘어야 할 산은 많다. 당장 동일노동을 어떻게 규정할지부터가 쉽지 않다. 경영계는 인건비 상승을, 노동계는 임금 하향평준화를 우려할 수 있다. 정규직 보호 문턱을 낮추고, 연공성이 강한 임금체계를 성과와 직무에 따라 보상하는 방향으로 재편하는 작업도 뒤따라야 한다. ‘동일노동 동일임금’을 하겠다면서 시간이 지나면 꼬박꼬박 임금이 오르는 호봉제를 유지한다는 건 논리적 모순이다.

선진국들은 일찍부터 공정하고 유연한 방향으로 노동 개혁을 실행해 왔다. 독일은 2000년대 초반 하르츠 개혁으로 유럽의 병자에서 벗어난 데 이어 4차 산업혁명에 따른 노동시장 변화 등을 반영한 ‘노동 4.0’까지 단행했다. 프랑스는 2016년 노동시장 유연화를 골자로 하는 노동법 개정을 통해 노동개혁을 성공했다. 한국이 호봉제를 배워왔던 일본조차 직무급제를 확대하고 노동 유연화를 통해 성장산업으로 인력 이동을 유도하는 방향의 ‘새로운 자본주의 실행계획 개정안’을 이달 내놨다.

반면 한국은 역대 정부마다 말로만 노동개혁을 외쳤을 뿐 제대로 이뤄낸 것이 없다. 전투적 대기업 노조 중심의 ‘87년 노동체계’는 견고하다. 시위 현장에서 울려 퍼지는 노래도 백골단과 구사대, 망치와 죽창이 가사에 나오는 35년 전 버전 그대로다. 현 정부도 노동개혁의 깃발만 띄웠을 뿐 아직 첫 단추조차 끼우지 못하고 있다. 정부와 노동계 모두 서로의 탓만 하며 시간을 보내선 안 된다. 첫차가 막차 되는 비극을 이젠 막아야 한다는 데 공감한다면 결국 길은 열릴 것이다.

#정규직#노동 개혁#동일노동 동일임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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