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김정은]토종 애니메이션 성장만큼, 깊어진 팬들의 스펙트럼

  • 동아일보
  • 입력 2023년 6월 14일 00시 01분


김정은 문화부 차장
김정은 문화부 차장
“안녕하세요. 고길동입니다. 오랜만이란 말조차 무색할 만큼 세월이 흘렀습니다. 우리 어린이들, 모두 그동안 잘 있으셨는지. 그런데 이제 다들 제 역할을 이해한다면서요? 제가 악역이 아니라 진정한 성인이었다는 말을 들을 줄이야. 껄껄.”

올해로 탄생 40주년을 맞은 만화 ‘아기 공룡 둘리’의 고길동 아저씨가 이제는 어른이 된 과거의 어린이 팬들에게 보낸 편지가 화제다. 지난달 24일 재개봉한 극장판 애니메이션 ‘아기공룡 둘리: 얼음별 대모험’의 배급사가 공식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계정을 통해 공개한 고길동의 편지는 3주 만에 1만여 명이 ‘좋아요’를 누르며 호응했다. SNS와 인터넷 커뮤니티에선 이를 두고 “어렸을 때 고길동 아저씨 욕한 거 반성합니다” “어른이 돼서 고길동의 편지를 보니 눈물이 난다”는 글이 이어졌다.

과거 고길동은 어린이들이 꼽는 대표적인 악역 캐릭터였다. 남극 빙하를 타고 서울 도봉구 우이천으로 떠내려와 자신의 집에서 더부살이하는 둘리를 비롯해 또치, 도우너에게 걸핏하면 짜증 난 표정으로 “이렇게는 못 살아, 당장 나가!”라고 호통을 쳤기 때문이다. 원작자인 김수정 작가는 만화잡지 ‘보물섬’에 둘리 만화가 연재되던 시기, 어린이 독자들이 둘리가 고길동을 괴롭힐 수 있는 아이디어를 담은 편지를 그에게 자주 보냈다고 밝혔다.

하지만 장난꾸러기 둘리의 친구였던 코흘리개들은 이제 성인이 돼 고길동의 주름과 내려앉은 어깨를 이해하며 “고길동은 대인이었다”라고 재평가한다. 중소기업에 다니는 40대 과장으로 빠듯한 살림을 꾸려 나가던 고길동이 아내, 아들, 딸, 어린 조카를 부양하며 둘리, 도우너, 또치 등 정체불명의 군식구까지 돌보는 건 쉽지 않았을 것이란 이유에서다. SNS를 중심으로 사고뭉치 ‘둘리 일당’이 고길동에게 끼친 손해 내역을 정리한 ‘고길동 피해목록’이 인기를 끌기도 했다.

“고길동을 이해한다면 비로소 어른이 된 것”이라 말하는 팬들의 변화에 고길동은 편지에서 이렇게 말한다. “인생이란 그런 것입니다. 이해하지 못한 상대를 이해해 나가는 것. 내가 그 입장이 될 수 있음을 인정하는 것. 살아 보니 거울 속에 제 표정, 제 얼굴이 비치는지. 추억을 통해 지나온 시간을 다시 마주하고 싶어하는 여전히 앳된 당신의 모습에 응원의 박수를 보냅니다.” 회사와 집을 오가며 고달픈 삶을 살아가는 이 시대의 고길동들이 원조 고길동의 편지에서 가장 울컥한 대목이 아닐까 싶다.

지난달 충남대 축제 무대에서 20학번 학생이 애니메이션 ‘뽀롱뽀롱 뽀로로’의 오프닝곡을 부른 영상이 유튜브를 중심으로 화제가 됐다. 구슬이 구르는 듯한 경쾌한 인트로가 흐른 지 5초도 안 돼 객석을 가득 메운 대학생들이 “노는 게 제일 좋아”라며 떼창을 한 것. 이를 두고 “뽀로로를 보고 자란 세대가 벌써 대학생이 됐냐” “2003년 첫 방영된 작품인 만큼, 뽀로로 1세대 팬들은 이제 어른이다”라는 반응이 이어졌다. 이들도 20년 뒤 중년이 됐을 때 주인공 뽀로로보다는 말썽쟁이 친구들에게 따뜻한 음식을 내어주는 상냥한 루피의 마음을 진정 이해하는 날이 오지 않을까. 토종 애니메이션의 성장만큼이나 이를 보고 자란 팬들의 인생도 깊어지는 모양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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