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찾아온 한 엄마가 있었다. 이 엄마의 친정아버지는 폭군이었다. 술만 마시면 가족들을 때렸다. 그녀는 그런 아버지가 너무 두렵고 무서웠다. 친정어머니는 이럴 때마다 무력했다. 아이들을 전혀 보호해 주지 못했다. 결국 그녀는 아버지에게 혼나지 않기 위해서 말을 잘 듣는 딸이 될 수밖에 없었다. 뭐든 순종적이고, 얌전하고, 야무지게 알아서 했다. 다행히 좋은 대학에 가고 착한 남자를 만나 결혼해서 아이도 낳았다.
그녀는 누구보다도 좋은 부모가 되고 싶었다. 좋은 아내가 되고 싶었다. 아이에게도 남편에게도 최선을 다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렇게 사랑하는 아이와 남편이 뭔가를 똑부러지게 처리를 못할 때 화가 나서 견딜 수가 없었다. 어린 시절의 해결되지 않은 감정의 문제가 어른이 되어서도 갈등으로 지속되고 있는 것이다.
의존 욕구라는 것이 있다. 아이가 부모에게 자신이 느끼는 감정을 인정받고 보호받고 싶어 하는 욕구이다. 아이는 부모에게서 “그래, 그렇게 느낄 수 있었겠구나”라는 말을 듣고 싶어 한다. 정서적 인정을 받고 싶은 것이다. 어리기 때문에 할 수밖에 없는 실수에 대해서 “아이니까 못하는 것은 당연해. 괜찮아”라는 말을 듣고 싶어 한다. 의존 욕구는 미숙함을 수용받고 싶은 욕구다. 화가 났을 때 부모에게서 위로받고 싶고, 기대고 싶을 때 자신을 허락해 주었으면 좋겠고, 어떤 상황에서도 사랑한다고 표현해 주었으면 좋겠다.
어린 시절 의존 욕구가 해결되지 않고 결핍된 채 남아 있으면, 평생을 살아가면서 중요한 대상과의 관계에서 끊임없이 이 욕구를 채우려고 든다. 심지어 아이와의 관계에서마저도 끊임없이 무리한 기준을 세우고 요구한다. 그 나이면 충분히 할 수 있는 실수인데도 “너 몇 살인데 아직도 이래?” 하거나 “너 엄마가 이렇게 하면 싫어하는 거 알아 몰라? 알면 하지 말았어야지”라고 다그친다.
의존 욕구가 해결되지 않으면, 아이든 남편이든 상대에게 ‘네가 나를 이해해야지, 내가 감정적으로 힘들면 네가 내 감정을 보호해줘야지. 내가 위로가 필요하면 네가 위로를 제공해야지’라는 식으로 생각하게 되기도 한다. 자신의 부모로부터 받았어야 하는 것을 아이에게, 남편에게 요구하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쉽게 욱하고 짜증을 부리게 된다.
그녀는 어린아이이기 때문에 미숙할 수밖에 없는 모습을 부모에게서 수용받아 본 적이 없었다. 이 때문에 의존 욕구가 해결되지 않은 채 자랐고, 아이나 남편의 미숙한 모습을 받아 줄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녀가 어린 시절 보였던 야무진 모습은 사실은 무서운 아빠로부터 살아남기 위한 허구의 독립이었고, 억압과 강압에 의한 것이었다. 스스로 차근차근 단계를 밟아 가며 배운 독립이 아닌 것이다.
아이는 실수를 허용받고, 다르게 시도해 보고, 그 안에서 어떤 감정적인 위로나 배려를 받는 과정을 통해 의존 욕구가 채워진다. 그러면서 실수를 줄여나가는 것을 배운다. 그녀는 이 과정을 지나지 못했다. 가장 안타까운 것은 지금 그녀가 자신의 아이에게 하는 행동이, 아이 또한 그 과정을 밟지 못하게 만들고 있다는 사실이다.
의존 욕구가 채워지지 않은 엄마 중에는, 아이들에게 지나치게 경제적으로 잘해 주려는 경우도 있다. 요즘은 덜한 편이지만 수십 년 전만 하더라도 아이가 여럿이면 누나나 여동생은 오빠나 남동생에게 우선순위가 밀렸다. 여자들은 거기에서 오는 억울함이 많았다. 그런 것에 맺힌 것이 많은 엄마들은, 아이가 갖고 싶은 것은 뭐든지 사주려고 한다. 옷도 비싼 것으로만 사준다. 유모차도 분유도 제일 비싼 것으로 산다. 아이가 커 갈수록 엄마의 이런 행동은 집안 경제에 타격을 준다. 어느 집 아이가 뭘 배운다고 하면 우리 아이도 얼른 시킨다. 제일 좋은 학원만 찾아다닌다. 겉으로는 교육열처럼 보이지만, 파헤쳐 보면 실상은 그렇지 않은 것일 수도 있다.
언제든 내가 뭔가 너무 과하다고 생각될 때는 나의 어린 시절과 성장 과정, 부모와의 관계를 꼭 생각해 봐야 한다. 배운 대로 하고 있든, 그 기억이 싫어서 반대로 하고 있든, 어떤 상처에 한이 맺혀서 아이에게 과잉으로 하든, 뭔가 반응이 너무 과한 것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그 이유는 반드시 내 안에 숨겨져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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