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박형준]노키아가 죽자 핀란드가 살아난 이유

  • 동아일보
  • 입력 2023년 6월 16일 00시 03분


경제위기에 창업 주저하는 문화 바꾼 핀란드
韓, 반도체 위기 계기로 수출 약점 개선해야

박형준 경제부장
박형준 경제부장
서울에서 핀란드 알토대 MBA 과정을 이수하던 2007년 8월이었다. 핀란드 헬싱키 현지에서 2주간 공부할 기회가 있었다. 그때 휴대전화 기업 ‘노키아’를 찾았다. 안내하던 여직원의 목소리에서 자신감이 느껴졌다. 그럴 만한 게 노키아는 핀란드 국내총생산(GDP)의 4%, 핀란드 전체 수출의 약 25%를 차지했다. 시가총액은 헬싱키 증시의 70%였다. 핀란드 경제는 노키아에 절대적으로 의존했다.

우연의 일치이겠지만, 기자가 방문한 2007년이 노키아의 최대 전성기였다. 같은 해 6월 애플이 아이폰을 내놓으면서 휴대전화 시장의 판도는 바뀌기 시작했다. 노키아는 새 흐름을 가벼이 봤다. 아이폰보다 더 많은 기능을 갖췄고, 자동차가 그 위를 지나가도 부서지지 않을 정도의 내구성을 가진 자사 휴대전화에 도취해 있었기 때문이다. 2008년 이후 노키아의 매출액과 영업이익은 수직 낙하했다. 결국 2014년 4월 핵심인 휴대전화 사업 부문을 마이크로소프트(MS)에 매각했다.

노키아의 추락에 핀란드 경제도 휘청했다. 핀란드의 휴대전화 수출은 2007년 3070만 대(69억 달러)에서 2012년 400만 대(9억 달러)로 줄었다. 핀란드 전체 수출은 2008년에 전년 대비 0.2% 줄어들었고, 이듬해에는 31.3% 급감했다. 무역수지는 2011년부터 2015년까지 5년 연속 적자였다.

그런데 세상사 참 묘하다. ‘노키아가 죽으니 핀란드가 살아났다’는 평가도 나왔다. 핀란드는 과거부터 연구개발(R&D) 투자 비율이 높고, 교육 경쟁력도 세계 1, 2위를 다툴 정도였지만 기업 실적은 신통치 않아 ‘핀란드 패러독스’라는 말까지 생겼다. 창업을 주저하는 문화, 고율의 법인세 등이 문제로 꼽혔다. 하지만 노키아의 몰락이 위기감을 불러왔고, 그 위기감이 핀란드 패러독스를 해결했다.

노키아는 2008년 이후 1만 명 이상의 공학 인재들을 구조조정했는데, 그들은 중소기업과 스타트업으로 흘러갔다. 점차 위험을 감수하고 창업에 도전하는 문화가 생겨나기 시작했다. 대학들은 산학협력을 통해 학생들의 창업 활동을 격려했다. 정부는 벤처캐피털을 조성해 신생 기업에 자금을 공급했다. 헬싱키기술대학 학생 3명이 창업한 로비오는 2009년 앵그리버드 모바일 게임으로 대성공을 거뒀다. 2010년 설립된 슈퍼셀은 전략 게임 ‘클래시 오브 클랜’의 성공으로 설립 4년 만에 약 2조 원의 매출을 올렸다. ‘노키아의 몰락이 핀란드의 이익이 되다’(월스트리트저널, 2011년 8월), ‘대기업이 쓰러질 때 기업가정신이 살아난다’(하버드비즈니스리뷰, 2013년 3월) 등 평가가 나왔다.

한국의 반도체 산업 부진을 보면서 10년도 더 지난 핀란드의 추억이 떠올랐다. 반도체가 부진하니 한국 수출은 8개월 연속 적자다. 무역수지도 15개월째 적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수출로 먹고사는 한국에 치명타라 할 수 있다. 올해 성장률은 1%대로 예상되는데, 외환위기와 같은 경제 충격 없이 1%대 성장률을 보이는 것은 처음 있는 일이다. 그만큼 소수 대기업이나 특정 산업에 의존한 경제 생태계는 위기에 취약할 수밖에 없다.

다만 핀란드 사례가 보여주듯 위기 상황이 오히려 한국의 고질병을 고칠 기회가 될 수도 있다. 특히 반도체와 중국에 대한 과도한 수출 의존도는 시급하게 해결해야 한다. 반도체가 무너지자 한국도 같이 무너질지 아니면 오히려 성장할지, 지금 그 갈림길에 서 있다.

#반도체 위기#수출 약점#개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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