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은 매년 파리에서 열리는 유럽 최대 스타트업 박람회 비바테크 현장을 찾아 주로 영어로 연설했다. ‘영어 하는 프랑스 대통령’은 외국인 투자자의 호감을 끌고 투자하기 좋은 나라 이미지를 부각하는 역할을 톡톡히 했다. 자국어와 자국 문화에 대한 자존심이 남다른 프랑스인들이 국제행사에서 영어를 쓰는 일은 드물기 때문이다.
그런데 올해는 달랐다. 마크롱 대통령은 14일(현지 시간) 개막한 비바테크 포르트 드 베르사유 전시장에서 프랑스어로 연설해 오히려 눈길을 끌었다. 연설 내용에서 그 이유를 짐작할 수 있었다. 그는 “영어를 쓰는 인공지능(AI)에 맞서 소프트파워를 키우는 명분으로 프랑스어를 쓰는 대형 AI 모델을 키우겠다”고 선언했다. 이를 위해 세계 프랑스어권 국가에서 프랑스어 AI 데이터베이스 개발자 2억 명을 양성하겠다고 밝혔다. 프랑스어 AI 언어처리모델을 개발하는 스타트업 2개사를 언급하며 이들 같은 곳을 더 육성하기 위해 공적 자금 4000만 유로(약 559억 원)를 투입하겠다고도 했다.
다른 유럽 주요국 수장들은 이 같은 자국어 AI 육성 방침을 밝히지 않았기 때문에 이날 마크롱 대통령의 발언이 더 인상적이었다. 그가 프랑스어 AI 개발을 서두르는 이유는 올해 돌풍인 생성형 AI 챗봇 ‘챗GPT’가 대개 영어로 된 데이터베이스를 학습해 정보를 생성하기 때문이다. 영어권 국가 시각에 치중하기 쉬운 영어로 된 정보만 집중 입력되면 챗GPT 같은 생성형 AI는 미국이나 영국 등에 유리한 정보를 무한 재생산할 가능성이 크다는 얘기다. 마크롱 대통령은 영어권 중심 정보가 생성형 AI에 의해 정설처럼 굳어지면 프랑스에 외교적, 경제적으로 악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 미국에 종속되지 않는 프랑스 독자 외교 노선을 강조하는 그로서는 AI 정보 전쟁의 패자(敗者)가 되는 것을 두려워할 만하다.
그렇다면 한국어가 외교나 학술, 문화 분야에서 공식 언어로 통용되지 않는 한국으로선 더욱 심각한 일이다. 한국어 자료를 충분히 입력받지 못한 생성형 AI는 훗날 우리가 당연히 진실이라고 믿는 명제를 진실이라고 토해내지 못할 수 있다. ‘독도는 한국 땅’이고 ‘동해가 맞고 일본해는 틀리다’고 아무리 주장해도 독도와 동해 관련 일본어로 된 정보가 더 많이 유입되면 우리 생각과는 상반되는 내용이 사실로 굳어질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실제 기자가 챗GPT에 ‘독도는 한국 땅인가 일본 땅인가’라고 질문하니 ‘독도 주권 문제는 논쟁 대상이며 최종 결정은 국제법, 협상 등을 통해 도출될 가능성이 있다’는 답이 돌아왔다.
AI의 정치적 편향성은 우려할 만하다는 연구 결과도 나온다. 유럽 논문 공유 플랫폼 ‘리서치게이트’에 실린 뉴질랜드 오타고 폴리테크닉 논문에 따르면 챗GPT에 정치적 성향 테스트 15건을 실시한 결과 14건은 좌파 선호 관점을 나타냈다. 챗GPT에 정치적 쟁점을 물으면 중립적으로 보이는 ‘정치적 의견이 없다’ ‘판단할 수 없다’는 답을 내놓곤 하지만 정밀 분석해 보면 그 맥락에는 편향성이 숨어 있다는 것이다.
국가 경제 측면에서도 AI 한국어 처리 모델 개발이 시급하다. 한국인 사용자가 무료 또는 싼값에 기존 AI 모델 의존도를 높이는 사이 외국 AI 개발사들은 그 비용을 높일 수 있다.
AI가 낳을 부작용을 막는 규제는 필요하다. 하지만 규제에 치중하느라 한국 맞춤형 AI 개발의 타이밍을 놓친다면 글로벌 AI 생태계에서 영어권, 일본어권 AI의 식민지화를 피하기 힘들어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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