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경제 장기불황 탈출에 촉각
외국인 투자금 유입에 활기… 탈중국 바람에 대체투자처 수혜
공급망 재편-반도체 투자도 호재… 엔저 힘입어 日기업 실적 호조
워런 버핏, 일본 증시 주목… 주주환원 정책도 증시매력 높여
《“일본의 떠오르는 태양(Japan’s rising sun).”
5월 시장에서 화제를 모은 만수르 모히우딘 싱가포르은행 수석 이코노미스트가 내놓은 리포트의 제목이다. 실제로 오랫동안 ‘저문 태양’에 가까워 보였던 일본 경제가 최근 꿈틀거리고 있다. 일본 경기가 호황이던 1989년 12월 38,915.87엔으로 올랐던 닛케이평균주가는 버블 붕괴 이후 하락하기 시작해 2009년 3월 7,054.98엔까지 주저앉았다. 하지만 올해 들어 일본 증시는 연일 고점을 갈아치우고 있다. 16일에는 33,706.08엔으로 장을 마치며 1990년 3월 이후 33년 만의 최고치도 경신했다. TOPIX 역시 지난해 말 대비 21.08% 올랐다.
일본 증시의 상승세는 전 세계적으로도 두드러진다. 닛케이평균주가는 5월 한 달 동안에만 7.04% 올라 주요 20개국(G20) 증시 가운데 두 번째로 높은 상승률을 보였다. 일본 증시가 33년 만에 최고치를 경신하면서 일본 경제가 ‘잃어버린 30년’을 극복할 가능성도 조심스레 점쳐지고 있다.》
● 중국의 대체 투자처로 떠오른 일본
일본 증시의 상승세를 이끌고 있는 것은 외국인 투자가다. NHK에 따르면 5일부터 9일까지 도쿄와 나고야 증권거래소에서 해외 투자자는 약 9854억 엔을 순매수하며 11주 연속 매수 우위를 보였다. 해외 투자자가 일본 주식을 11주 연속 순매수한 것은 아베노믹스 초기인 2013년 1월 이후 10년 5개월 만이다.
그 배경으로 투자금의 탈(脫)중국 현상이 꼽힌다. 중국의 경기 회복 속도가 기대에 미치지 못한 데다 정부 규제로 불확실성이 높아지자 투자자들은 중국에서 자금을 빼 다른 아시아 국가로 옮기고 있는데, 특히 일본으로 자금이 유입되고 있다는 얘기다. 골드만삭스에 따르면 전 세계 헤지펀드 운용사들의 중국 주식 비중은 올해 1월 13%에서 지난달 말 9%로 떨어졌다. 미국 타깃데이트펀드(TDF) 전문 자산운용사 티로프라이스의 신흥 시장 및 일본 주식 포트폴리오 전문가 대니얼 헐리는 “일본의 경제 회복과 ‘비중국 무역’이 일본 시장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있다”며 “아직은 ‘시작 단계’에 불과하다”고 분석했다.
미중 갈등으로 반도체 공급망이 재편되는 과정에서도 일본이 수혜를 보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지난달 미국과 일본 정부는 중국발(發) 경제안보 위험을 최소화하는 ‘디리스킹(derisking·탈위험)’의 일환으로 차세대 반도체를 공동 개발하는 등 협력 수준을 높이는 내용의 공동성명을 발표했다. 미 반도체 기업 마이크론은 일본에 약 5조 원을 투자해 차세대 D램을 생산하기로 했다.
● 日 기업 실적 뒷받침한 ‘엔저 효과’
일본 기업들도 ‘호실적’을 보이고 있다. SMBC닛코증권이 금융사를 제외한 상장기업 1308곳의 2022회계연도(2022년 4월∼2023년 3월) 실적을 분석한 결과 상장사들의 매출액은 이전 회계연도보다 14.2% 증가한 580조3000억 엔으로 잠정 집계됐다. 영업이익 역시 4.2% 늘어난 39조1000억 엔으로 전망됐다.
최저 수준으로 떨어진 엔화 가치가 일본 기업들의 실적을 뒷받침한 것으로 평가된다. 지난해 10월 달러당 엔화 환율이 32년 만에 150엔을 돌파하는 등 엔화 가치가 하락하자 수출이 증가했고, 종합상사들은 외화로 벌어들인 금액을 엔화로 환산하면서 순익이 늘어났다. 미쓰이물산, 미쓰비시상사 등은 일본 종합상사 중 처음으로 연간 순이익 1조 엔을 넘어섰다. 세계적인 투자자인 워런 버핏 버크셔해서웨이 회장도 4월 일본의 종합상사 주식을 보유하고 있다며 일본 주식에 적극적으로 투자하겠다는 뜻을 전하기도 했다.
‘엔저 현상’은 앞으로도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 주요국 중앙은행이 긴축을 이어온 것과 달리 일본은행(BOJ)은 대규모 금융완화 정책을 유지하고 있다. 16일 금융정책결정회의에서 일본은행은 단기금리를 ―0.1%로 동결하고 장기금리 지표인 10년물 국채 금리는 0%로 유도하는 통화정책을 유지하기로 결정했다. 나카자와 쇼를 비롯한 미쓰비시UFJ모건스탠리 전략가들은 “완화적인 통화정책 기조는 일본을 미국 및 유럽과 차별화한다”며 “이 차이가 일본 주식에 대한 투자 환경의 안정성을 강조할 것”이라고 밝혔다.
● 주주 환원 정책, 日 증시 매력 높여
여기에 적극적인 주주 환원 정책도 일본 증시의 매력을 높였다. 올해 3월 도쿄증권거래소(TSE)는 주가순자산비율(PBR)이 1배 이하인 상장사에 주가를 끌어올리기 위한 구체적인 방안을 마련하고 이를 공시할 것을 요구했다. PBR은 기업이 보유한 순자산 대비 주가 수준으로, PBR이 낮을수록 해당 주식이 저평가됐다는 의미다.
이후 미쓰비시상사, 후지쓰 같은 대기업이 자사주 매입 계획을 발표하는 등 일본 기업들의 주주 환원 정책이 이어졌다. 니혼게이자이신문이 2023회계연도(2023년 4월∼2024년 3월) 일본 상장기업의 배당 계획을 집계한 결과 예상 배당액은 15조2200억 엔으로 나타났다. 역대 최대치였던 전년보다도 1000억 엔이 늘어난 규모다. 세계 경기의 불확실성이 커진 상황에서도 전체 상장기업의 30%가 배당을 늘리겠다고 발표했다. 자사주 매입 움직임도 활발하다. 올해 들어 지난달 말까지 일본 기업의 자사주 매입 규모는 5조1600억 엔에 달해 역대 최대였던 지난해(9조4000억 엔)를 넘어설 수 있는 추세를 보였다.
일본의 주주 환원은 미국을 앞설 정도다. 이재만 하나증권 글로벌투자분석팀장은 “지난해 닛케이평균주가의 배당성향은 41%로,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500(35%)을 상회할 뿐만 아니라 2023, 2024년 전망치 역시 상대적으로 높다”고 분석했다.
● “日 경제, 생산성 향상이 과제”
그렇다면 최근의 증시 순풍에 힘입어 일본 경제가 오랜 침체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국제금융센터에 따르면 주요 해외 투자은행(IB)들은 일본 증시에 대해 낙관적인 시각을 제시하고 있다. 맥쿼리는 “양호한 유동성 여건, 견고한 기업 실적 등으로 향후 2, 3년간 일본 증시는 ‘황소장(Bull Market·상승장)’이 지속될 가능성이 있다”고 분석했다.
하지만 일본 증시가 완전히 상승 국면에 접어들었다고 보기 이르다는 지적도 나온다. 문남중 대신증권 연구위원은 “경제 성장의 연속성을 확인하고 통화정책의 불확실성이 해소되어야 한다”며 “일본 증시가 과거에도 30,000엔 선 안착에 실패했던 경험이 있는 만큼 해당 요인들이 확실해지는 3분기(7∼9월)까지 기다릴 필요가 있다”고 설명했다. 하반기 주요국의 경기침체 우려도 변수다. UBS는 “경기침체 우려로 미국 주식시장이 조정 압력을 받을 경우 일본 증시의 ‘나 홀로’ 선방은 쉽지 않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또 일본 경제가 증시 회복을 넘어 ‘잃어버린 30년’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노동 생산성의 질적 향상이란 과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이지평 한국외국어대 융합일본지역학부 특임교수는 “아베노믹스 이후 여성, 고령자의 경제활동으로 취업자 수가 증가했는데, 인구가 감소하는 상황에서 이러한 양적인 성장은 한계가 있다”며 “디플레이션이 해소되고 임금이 상승하기 시작한 만큼 그에 상응하는 생산성 향상이 중요하다”고 분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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