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예술의전당 교향악축제 둘째 날인 2일, 김건 지휘 창원시립교향악단은 체코 작곡가 스메타나의 연작 교향시 ‘나의 조국’ 6곡 전곡을 선보였다. 유명한 두 번째 곡 ‘블타바(몰다우)강’ 중간부에는 현의 여린 선율 위에 플루트를 비롯한 목관이 꿈꾸는 듯한 장식음을 수놓는다. 스메타나는 이 부분을 ‘달빛 아래 루살카의 춤’이라고 설명했다.
공교롭다 싶었다. 체코에서 6월 초는 ‘루살카 주간’이기 때문이다. 이 기간에 사람들은 강이나 호수에 들어가기를 피한다.
루살카란 슬라브 전설에 나오는 물의 요정이다. 본디 물의 생명력을 들판에 전달해 농사를 도와주는 은혜로운 존재로 여겨졌다. 그런데 19세기 들어 무서운 존재라는 새 의미가 덧씌워졌다. 애인이나 남편에게 버림받은 여인들이 루살카가 되어 남자들을 물로 유인한 뒤 익사시킨다.
스메타나의 후배인 체코 음악가 드보르자크의 가장 유명한 오페라도 ‘루살카’다. 물의 요정 루살카는 인간 왕자와 사랑에 빠진다. 그가 달님에게 자신의 사랑을 전해 달라고 부르는 아리아가 유명한 ‘달의 노래’다. 루살카는 마녀를 찾아가 자신이 인간이 되도록 도와 달라고 말한다. 마녀는 루살카가 인간이 되면 말을 잃을 것이며 왕자와의 사랑을 이루지 못하면 죽어 영원히 저주받을 것이라고 말한다.
매우 익숙한 이야기처럼 들릴 것이다. 디즈니 영화의 원작인 안데르센의 동화 ‘인어공주’는 1837년, 오페라 ‘루살카’는 1901년 세상에 나왔다. 오페라 루살카가 안데르센의 동화를 모방했다는 설은 여러 차례 제기됐지만 체코 학계는 이를 부정하고 있다. 반대로 안데르센이 슬라브 설화에서 영향을 받았는지에 대해서도 확인된 바는 없다.
당초 인간에게 도움을 주는 존재였던 루살카가 불행의 아이콘이 된 것은 슬라브 숲의 정령 ‘빌리’에서 영향을 받은 것으로 여겨진다. 빌리 역시 19세기 이후의 루살카처럼 버림받은 여성들이 유령으로 변한 존재다. 서유럽으로 먼저 퍼져 나가기는 빌리 쪽이 먼저다. 프랑스 작곡가 아당의 발레 ‘지젤’(1841년)이 빌리 설화에 기초하고 있다. 숲에 사는 소녀 지젤은 연인에게 배신당하고 죽은 뒤 빌리가 된다.
내년 서거 100주년을 맞는 이탈리아 근대 오페라의 아이콘 자코모 푸치니가 26세 때 발표한 첫 오페라도 ‘빌리’다. 작은 마을 처녀 안나와 청년 로베르토는 영원한 사랑을 맹세하지만 친척의 유산을 상속받으러 떠난 로베르토는 돌아오지를 않고, 절망 속에 죽은 안나는 빌리가 되어 뒤늦게 돌아온 로베르토에게 보복한다.
푸치니의 오페라는 전 세계 오페라 프로덕션의 4분의 1을 차지하지만 유독 이 데뷔작은 공연되는 일이 적다. 음악이 미숙해서는 아니다. 음악원을 갓 졸업한 시기의 작품임에도 달콤한 선율과 생생한 관현악이 살아 숨쉰다. 베르디의 흥행사였던 줄리오 리코르디는 이 작품의 시범 연주를 들은 뒤 푸치니에게 완전히 매료돼 평생 그를 후원했다.
특히 이후 ‘라보엠’ ‘나비부인’에서 세계인의 마음을 울리게 되는 ‘푸치니 공식’이 바로 이 작품에서 시작된다. 첫 장면에서 주인공 남녀는 달콤한 사랑을 노래한다. 중간에 남자의 무책임 또는 무능으로 긴 이별이 이어지고, 마지막 장면은 첫 장면과 같은 곳에서 전개되지만 두 사람은 더 이상 사랑을 이어갈 수 없는 서글픈 상황이다. 이런 가운데 첫 장면의 선율들이 잇따라 회상되며 슬픔을 극적으로 고조시킨다.
이 매력적인 작품이 잘 공연되지 않는 가장 큰 이유는 한 시간 남짓한 짧은 길이 때문이다. 이 작품은 손초뇨 출판사가 제정한 단막 오페라 작곡 콩쿠르에 응모하기 위해 짧게 쓰였다. 콩쿠르에는 떨어졌는데, 이는 라이벌 손초뇨의 손에 이 작품이 넘어갈 것을 염려한 리코르디의 공작 때문이라는 설이 나온다. 푸치니가 음악원 시절 하숙집을 같이 썼던 피에트로 마스카니는 4년 뒤 이 콩쿠르에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로 당선했고, 오늘날 이 짧은 오페라는 같은 콩쿠르에서 실격당한 레온카발로의 ‘팔리아치’와 함께 무대에 오르고 있다.
내년에는 ‘팔리아치’를 잠시 잊고 하숙집 친구였던 푸치니와 마스카니의 두 단막 오페라를 하룻밤에 만나볼 기회가 생긴다면 어떨까. ‘푸치니 광팬’의 달콤한 상상에 불과한 얘기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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