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십 년 동안 세상에 나오지 않았던 책을 읽었다. 지난해 프랑스에서 출판된 이 책의 제목은 ‘전쟁’이며 저자는 루이페르디낭 셀린이다. 더 일찍 출판되지 않은 이유는 굳이 언급하지 않겠다. 본격적으로 이야기를 하게 되면 지면이 턱없이 모자라기 때문이다. 어쨌든 ‘전쟁’을 읽고 나니 내가 또 다른 셀린 책인 ‘밤의 끝으로의 여행’을 왜 그렇게 좋아했는지 또 한 번 상기하게 됐다. 나는 그 책을 좋아하는 것뿐만 아니라 필독서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이 두 편의 반자전적 소설은 제1차 세계대전에서 매복 중 부상을 입은 한 젊은 병사가 영웅적이지 않고 애국심도 없는 군인임에도 불구하고 주변 사람들로부터 영웅 대접을 받는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주인공인 페르디낭 바르다뮈는 자기 주변의 모든 사람, 그러니까 상사, 가족, 동료, 동지들을 모조리 부인한다. 마치 주변의 모든 사람과 전쟁 중인 것처럼 말이다.
실제로 두 책 모두 코믹하고 혼란스러운데, 책을 읽다가 잠시 덮고 셀린의 재치를 떠올리며 큰 소리로 웃게 만드는 그런 종류의 유머가 등장한다. 그런데 알다시피 거의 모든 유머 아래에는 깊은 고통과 상처가 자리한다. 또한 광적으로 성적인 장면이 많이 포함된다. 웃음과 성, 이 조합은 종종 최전선에서 전쟁의 공포를 직접 경험한 사람을 구원하는 유일한 은총이다.
프랑스에서 셀린은 20세기 프랑스 문학을 표현력의 절정으로 끌어올리며 새로운 장을 연 작가로 평가된다. 그러나 그의 정치적 입장은 옹호될 수 없으므로 대단히 문제적 작가이기도 하다. 셀린은 공개적으로 반유대주의자였으며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망명길에 올라야 했다. 그러나 동시에 ‘밤의 끝으로의 여행’이 지난 100년 동안 쓰인 위대한 고전 중 하나라는 사실을 부인할 사람은 거의 없다.
셀린의 이야기가 떠오르는 이유는 지난주에 접한 한 뉴스를 보며 한동안 고민에 빠졌기 때문이다. 내가 해외 시장에 항상 추천하는 한국 작가들의 단편 소설이 몇 편 있는데, 그중 하나가 오정희 작가의 ‘불의 강’이다. 내 생각에 이 단편 속의 주인공은 한국에서 나온 이야기 중 세심하게 구성된 주인공 중 하나다. 오정희는 단 몇 페이지 만에 여성과 가부장제, 농업 국가에서 산업화 국가로의 전환, 파괴적인 전쟁의 결과에 대해 가능한 한 가장 미묘하고 절제된 방식으로 이야기를 풀어냈으며, 항상 이념을 가장 앞에 내세우며 멜로드라마에 가까울 정도로 가슴 아픈 타 작품들과는 선을 긋는다. 거기에 또한 작가 특유의 문체가 훌륭하게 드러나 있기도 하다.
내가 들었던 뉴스는 올해 서울국제도서전 개막식에서 오정희 작가를 홍보대사로 선정한 것에 대해 여러 사람이 항의했다는 것이다. 항의의 이유를 이후에 알게 되었는데 오정희 씨가 한국 문화예술기관의 위원으로 활동할 때 예술가와 작가들의 이름을 블랙리스트에 올려 감시하고 심지어 사찰하는 데 도움을 줬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소식은 나를 고통스럽고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불의 강’을 쓴 사람이 어떻게 그런 일을 할 수 있었을까? 그러다 셀린이 떠올랐다. ‘밤의 끝으로의 여정’이라는 작품을 쓴 사람이 어떻게 그렇게 격렬한 반유대주의자가 될 수 있었을까? 이것은 도대체 대답할 수 없는 질문이다. 오히려 우리는 이를 통해 인간이 얼마나 복잡하고 모순적이며 종종 역겨울 정도로 비열한 존재인지 돌아보게 되며, 지상 최고의 작가들조차도 이 질문에서 벗어날 수 없다.
우리는 이들의 작품과 삶을 분리해야 할까, 말아야 할까? 셀린과 오정희라는 사람이 삶에서 드러낸 치명적인 부분이 있으니 이들의 작품을 읽지 말아야 할까? 나는 독자 개개인이 누구의 지시를 받지 않고도 자신에게 가장 편한 결정을 내릴 수 있을 만큼 충분히 성숙했다고 믿는다. 그러나 문학은 인기투표가 아니며, 인기투표가 되어서도 안 된다는 점은 명심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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