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알의 모래에서 세계를 보고/한 송이 들꽃에서 천국을 보라/그대 손바닥 안에 무한을 거머쥐고/찰나에서 영원을 붙잡아라.”
―윌리엄 블레이크 ‘순수의 전조’ 중에서
타임캡슐을 타고 시간 여행을 할 수 있다면 어떨까? 과거로 역진해서 실패했던 사건을 복원하고 미래의 시간 설계도를 미리 헤아릴 수 있다면, 현재 이 순간에 최적의 선택을 할 수 있을까? 그러나 디지털 세계와는 달리 우리는 과거 복원 지점을 설정할 수도 없고, 미래를 엿볼 수도 없다. 지나간 시간을 되돌릴 수 없고, 도래하지 않은 시간과 마주할 수 없다. 다만 전조를 헤아리는 예지에 눈빛을 밝힐 따름이다.
블레이크의 ‘순수의 전조’ 앞 4행은 너무나 잘 알려진 구절이다. 들꽃으로 피어나는 천국의 무한한 가능성을 볼 수 있는 ‘눈’이 전경화된다. 시각동사 ‘보다’가 그런 가능성의 시작이다. 눈은 헤브라이어(히브리어) 첫 번째 알파벳이자 처음을 뜻하는 ‘알레프’를 떠올리게 한다. 환상 문학의 거장 보르헤스는 ‘알레프’를 통해 전체성의 만화경에 도전했다. 무지갯빛 작은 구체(球體) 안에 모든 우주의 공간이 담겨 있는 만화경. 보르헤스는 적었다. “각각의 사물은 무한했다.”
블레이크의 모래도, 들꽃도 무한하다. 끝 모를 가능성의 천국이다. 문제는 그 기미를 알아차릴 눈이다. 전체성에 대한 성찰은 무한한 가능성을 향한 열정이다. 순간에 순수하게 몰입할 때 무한한 영원으로 승화되는 놀라운 행복감에 젖을 수 있다. 그런데 대개 내 앞의 모래는 사소하고, 들꽃은 초라한 경우가 많다. 많은 게 불확실하고 불가사의하다. 더욱이 가능성은 봉인된 것처럼 보인다.
그럴수록, 혹은 그러니까 제대로 눈을 뜨고 손을 써야 하리라. 눈은 인식이고 손은 실천이다. 나는 내가 보는 것으로 나이고, 내 손을 통해 세계로 열리고 우주로 깊어지는 나를 체험한다. 나는 꿈꾼다. 들꽃으로 피어나는 천국의 무한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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