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웅 회고[이준식의 한시 한 수]〈219〉

  • 동아일보
  • 입력 2023년 6월 29일 23시 3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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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패는 군대에서 예측하기 어려운 법, 수모와 치욕을 견뎌야 진정한 대장부.
강동 젊은이 중에 인재가 넘쳤으니, 권토중래할는지는 그 누구도 몰랐으련만.
(勝敗兵家事不期, 包羞忍恥是男兒. 江東子弟多才俊, 捲土重來未可知.)

―‘오강정에서 짓다(제오강정·題烏江亭)’ 두목(杜牧·803∼852)

















시황(始皇)의 통일 제국 진(秦)이 스러진 후 한왕 유방(劉邦)과 초왕 항우(項羽)의 패권 다툼은 치열했다. 해하(垓下) 전투에서 궁지에 몰린 항우는 애첩 우희(虞姬)와 작별한 후 유방의 포위를 뚫고 오강(烏江)에 다다른다. 당초 8000여 명의 강동 젊은이를 이끌고 전투를 치렀던 항우에게 남은 병사는 수백 명뿐. 마침 오강의 관리가 배를 준비해두고 강동으로 건너가 후일을 도모하라고 권유한다. 하지만 패배의 치욕을 견디지 못한 항우는 그 길로 적진으로 뛰어들어 생을 마감한다. 실패한 영웅의 장렬한 최후에 대해 역사는 포폄이 엇갈린다. 사마천의 ‘사기(史記)’는 패왕(霸王)을 자처하며 초나라의 부흥을 도모했던 항우를 제왕의 치적으로 기록한 반면, 두목은 불세출의 지도자가 허망하게 무너진 것이 너무나 실망스러웠다. ‘강동 젊은이 중에 인재가 넘쳤으니, 권토중래할는지는 그 누구도 몰랐으련만.’ 영웅의 자포자기를 못내 애석해하며 시인은 재기의 다짐을 뜻하는 ‘권토중래(흙먼지 일으키며 다시 쳐들어온다)’라는 신조어까지 만들어 썼다.

그로부터 약 200년 후 두목의 시를 읽은 왕안석의 생각은 달랐다. ‘수많은 전투에 지친 장수는 사기 떨어지고, 중원의 패배는 만회하기 어려웠지. 비록 강동 젊은이들 여태껏 남아 있다 해도, 기꺼이 군왕과 권토중래하려 했을까.’(‘다시 오강정에서 짓다’·‘첩제오강정·疊題烏江亭’) 천하대세는 이미 기울었고 그간 독단적으로 행동해온 항우에게서 민심은 멀어졌으리란 게 왕안석의 판단이었다.

#오강정에서 짓다#영웅 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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