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펠로폰네소스 전쟁(기원전 431년∼기원전 404년)은 델로스 동맹의 맹주 아테나이와 펠로폰네소스 동맹을 이끈 스파르타의 패권 다툼이었다. 동맹에 속하거나 중립을 내세웠던 나라들이 하나둘씩 전쟁에 말려들면서 다툼은 ‘세계 대전’으로 확대되었다. 이 주변국들은 ‘고래 싸움에 등 터진 새우’ 같은 희생자였을까? 그렇게 보는 것은 너무 일면적이다. ‘펠로폰네소스 전쟁사’는 거대한 파국이 어떻게 ‘먼 나라의 불화’에서 시작되었는지를 보여주면서 유사한 사건의 반복을 경고하는 투키디데스의 ‘징비록’이다.》
먼 나라에서 시작된 전쟁
널리 알려져 있듯이 투키디데스는 펠로폰네소스 전쟁의 ‘가장 참된 원인’을 아테나이의 세력 팽창에 대한 스파르타인들의 두려움에서 찾았다. 하지만 어떤 사건에서든 주된 원인이 있다면 보조적 원인도 있기 마련이다. 아테나이의 팽창이 펠로폰네소스 전쟁의 주된 원인이었다면, 그 배후에는 고대 그리스 세계의 고유한 갈등 구조가 있었다. 당시 그리스의 여러 나라는 귀족정과 민주정의 정체 갈등을 겪었고, 이런 내부 갈등은 다른 나라들과의 동맹 관계와 얽혀 더더욱 복잡한 양상을 띠었다. 나라 안에서 누가 정권을 잡느냐에 따라 동맹 관계가 달라졌고 동맹 관계에 따라 국내 정체가 좌우되었기 때문이다.
얽히고설킨 갈등은 특히 식민지와 모시(metropolis) 사이에서 자주 불거졌다. 도식적으로 생각해 보자. 나라 A가 인구 과잉이나 토지 부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식민지 B를 개척한다. B 역시 똑같은 문제에 직면해서 식민지 C를 세운다. 피를 나눈 A, B, C의 관계는 어떨까? A는 B의 내정에 간섭하고 B는 이에 반발한다. A와 B의 갈등이 B와 C 사이에서도 반복된다. 게다가 A, B, C가 저마다 정체 갈등에 빠져들면 상황은 더 꼬일 수밖에. 투키디데스 전쟁사는 이런 갈등 속 ‘삼대(三代)’의 이야기에서 시작한다. 코린토스-케르퀴라-에피담노스의 갈등이 전쟁의 도화선이었던 것이다.
에피담노스는 케르퀴라 이주민들이 세운 나라였다. 먼 곳 작은 나라의 내분이 큰 전쟁의 불씨가 되리라고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그런데 에피담노스에서 민주파가 귀족파를 몰아내고 정권을 장악하면서 분쟁의 도미노 현상이 일어났다. 쫓겨난 귀족파는 외부 세력을 끌고 돌아와 민주파를 공격했다. 민주파는 케르퀴라에 도움을 청했지만, 케르퀴라는 중립을 내세워 지원을 거절했다. ‘아버지’에게 외면당한 에피담노스는 ‘할아버지’ 코린토스에게 손을 벌렸다. 주권을 넘기겠다는 약속과 함께.
집안싸움이 온 동네 싸움으로 비화
코린토스인들에게는 반가운 제안이었다. 평소 모시를 깔보던 케르퀴라를 응징할 기회가 왔다! 괘씸한 ‘아들’을 혼내려 ‘손자’ 편을 드는 ‘할아버지’의 심정이 그럴까? 에피담노스 사태에 코린토스가 개입하자 케르퀴라의 입지가 흔들렸다. 에피담노스의 지배권을 놓고 코린토스와 충돌한 케르퀴라는 마침내 중립을 포기하고 아테나이와 동맹을 맺는다.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코린토스가 스파르타의 동맹국이었으니까. 아테나이가 케르퀴라와 코린토스의 싸움에 개입하면서 집안 싸움이 온 동네 싸움으로 비화된 셈이다.
코린토스의 입장에서는 케르퀴라가 미운 자식이라면 아테나이는 오랜 원수였다. 경쟁심과 복수심에 불타오른 코린토스가 동맹국 스파르타를 끌어들여 전쟁을 벌이려 한 것은 당연하다. 처음에는 아테나이도 스파르타도 전면전을 원치 않았다. 투키디데스는 평화를 위한 두 나라의 외교적 노력을 자세히 소개한다. 하지만 두 나라는 전략적 딜레마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케르퀴라의 함대가 문제였다. 이 함대가 아테나이 수중에 들어가면 펠로폰네소스 동맹국들은 넓은 바다에 배 한 척 띄울 수 없는 처지가 된다. 반면, 케르퀴라의 함대가 펠로폰네소스 동맹으로 넘어가면 해군에 모든 것을 걸었던 아테나이가 위태로워진다. 달리기 시작한 기차에서 누가 뛰어내릴 수 있을까?
투키디데스의 모델로써 국제전의 원인을 설명하려는 사람이 많다. 그런 사람은 마땅히 전쟁의 ‘가장 참된 원인’만큼 보조적 원인도 함께 따져야 할 것이다. 제1차 세계대전을 독일의 세력 팽창에 대한 영국인들의 두려움에서 찾는 사람은 당연히 오스트리아 제국과 세르비아의 관계에 주목해야 한다. 미국과 중국의 패권 다툼을 새로운 ‘투키디데스의 함정’으로 지목한 그레이엄 앨리슨은 대만이 ‘케르퀴라’가 될 위험성을 경고했다. 하지만 어디 대만뿐일까? 내부 갈등에 휩싸인 나라, 이 내분이 외부 동맹 관계를 흔들어 놓을 수 있는 나라는 언제든 더 큰 전쟁의 도화선이 아닐까?
투키디데스와 플라톤이 남긴 경고
전쟁의 동기를 제공한 케르퀴라의 운명은 어땠을까?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발발하고 몇 년 뒤 케르퀴라는 잿더미가 되었다. 도시를 파괴한 것은 외침이 아니라 내전이었다. 에피담노스 사태의 복제판이었다. 코린토스에 포로로 잡혀갔다가 돌아온 전향자들이 민주파를 공격했다. 법정 소송에서 시작된 공격은 암살과 테러, 권력 탈취로 이어졌다. 하지만 지원하던 스파르타 군대가 퇴각하자 민주파의 반격이 시작되었다. 격렬한 내전에 중립은 불가능했다. 여자들까지 싸움에 나섰을 정도다. “어떤 사람들은 개인적 원한 때문에 죽었고, 또 다른 사람들은 빚을 준 탓에 채무자의 손에 죽음을 맞았다.” “아버지가 아들을 죽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런 참상은 케르퀴라에 국한된 일이 아니었다. “각지에서 분란이 일어나 민중의 지도자들은 아테나이인들을, 소수파는 스파르타인들을 끌어들이면서, 나중에는 그리스 세계 전체가 동란에 말려들었기 때문이다.”
‘펠로폰네소스 전쟁사’는 ‘전쟁(polemos)’의 기록이기에 앞서 ‘내분(stasis)’의 기록이다. ‘한 나라의 내분이 동맹국들의 전쟁을 부르고 이 전쟁이 다시 내전을 격화시켜 문명을 야만 상태로 끌어내린다.’ 나는 이것이 투키디데스 전쟁사의 요약이라고 생각한다. 플라톤이 ‘국가’에서 정치의 목적을 내분을 막는 데 둔 것도 그 때문이다. 그는 내분의 위험과 파괴력을 누구보다 뼈저리게 체험한 사람이었다. 그의 처방이 모든 정치적 의견 차이를 배척할 정도로 강박적인 것은 문제이지만.
투키디데스와 플라톤의 경고가 과장이 아님을 우리는 잘 안다. 73년 전 이 땅에서 벌어진 전쟁을 기억하기 때문이다. 어떤 통계에 따르면 남북한 군인 사망자가 약 44만 명인 데 반해 민간인 사망자는 약 65만 명이었다(‘마을로 간 한국전쟁’). 수많은 사람이 “마을에서 벌어진 작은 전쟁들”에 희생되었다. ‘펠로폰네소스 전쟁사’의 경고를 ‘길 건널 때 조심해라’라는 노모의 걱정처럼 웃어넘길 수 없는 이유가 여기 있다. 내분을 막는 정치 이외에 ‘케르퀴라의 운명’을 피하는 방법이 무엇일까.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