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코틀랜드 프로축구 1부 리그 팀 셀틱이 최근 국내 프로축구 K리그1 강원 구단에 양현준을 데려가고 싶다며 ‘영입 오퍼’를 넣었다. 올해 21세인 양현준은 성인 국가대표팀에서 A매치(국가대항전)를 뛴 적이 한 번도 없는 선수다. 태극마크를 달고 뛴 건 23세 이하 대표팀에 뽑혀 6경기를 뛴 게 전부다. 그런데도 스코틀랜드 리그 명문 구단인 셀틱이 영입하겠다고 나선 것이다. 셀틱은 K리그1 수원에서 뛰던 오현규를 올해 1월 영입한 팀이다.
지난 시즌 국내 프로축구 2부 리그인 K리그2에서 신인상에 해당하는 영플레이어상을 받은 엄지성(광주)과 서울의 수비수 이한범도 유럽 팀들이 관심을 보이는 선수다. 엄지성과 이한범 역시 올해 21세다. 엄지성은 A매치를 딱 한 번 뛰었고, 이한범은 출전한 적이 없다.》
● 국제무대 ‘쇼케이스’ 안 거쳐도 유럽행
양현준, 엄지성, 이한범처럼 월드컵이나 아시안컵, 올림픽 같은 메이저급 국제 대회에 출전한 적이 없는 20세 안팎의 어린 선수들도 이제 유럽 스카우트들의 주목을 받고 있다. 유럽 구단 스카우트들이 평소 꾸준하게 관심을 둘 정도로 기량이 뛰어난 한국 선수들이 그만큼 많아졌다는 의미다. 그러면서 한국 선수들이 유럽 리그로 진출하는 경로도 다양해졌다.
과거엔 일단 성인 국가대표팀에 뽑힌 뒤 월드컵이나 아시안컵 같은 메이저 대회에서 눈에 띄는 경기력을 보여야 유럽 스카우트들의 수첩에 이름이 올랐다. 대략 5, 6년 전까지만 해도 유럽 스카우트들은 국내 프로축구 K리그에 별 관심을 두지 않았다.
국가대표팀을 이끌었던 외국인 감독의 눈에 드는 것도 유럽 리그로 진출하는 대표적인 루트 중 하나였다. 2002년 한일 월드컵 당시 한국 대표팀을 지휘한 거스 히딩크 감독을 따라 네덜란드 리그에 진출한 박지성과 이영표가 대표적이다. 2006년 독일 월드컵에 출전했던 김동진과 이호는 당시 대표팀 사령탑이었던 딕 아드보카트 감독을 따라 러시아 리그로 갔다.
최근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EPL) 브렌트퍼드 유니폼을 입은 김지수는 한국 선수의 유럽 리그 진출사에 새 이정표를 세웠다. 2004년 12월생으로 올해 19세인 김지수는 세계 최고 레벨의 축구 리그로 평가받는 EPL에 진출한 15번째 한국 선수인데 10대로는 처음이다. EPL에 입성한 한국 선수 최초의 중앙수비수다. 중앙수비수는 다른 포지션에 비해 거친 몸싸움이 잦아 그동안 유럽 리그에선 아시아 선수들이 힘을 쓰기 쉽지 않았던 자리다. 김지수는 지난달 열린 국제축구연맹(FIFA) 20세 이하(U-20) 월드컵에서 한국의 4강 진출에 힘을 보탰는데 역시 A매치 출전 경험은 없다. 브렌트퍼드 구단이 김지수의 전 소속 팀인 성남에 이적 관련 제안을 한 건 U-20 월드컵이 열리기 전부터다.
이제 유럽 구단들은 스카우트를 한국으로 보내 선수들의 경기력을 직접 확인하고 있다. K리그1 구단의 한 관계자는 “우리 선수들의 프로필을 달라고 요청하는 유럽 구단들이 몇 년 전부터 부쩍 많아졌다”며 “유럽 구단 스카우트들이 경기장에 직접 나타나기도 한다”고 말했다. 국내 구단들도 이제는 소속 선수의 유럽 진출을 예전처럼 ‘손해’로만 여기는 분위기가 아닌 것도 한국 선수들의 유럽행 증가에 영향을 주는 것으로 보인다. 국내 구단 관계자는 “선수들의 이적을 손해로 볼 필요는 없다. 유럽 구단들도 이제는 선수들의 몸값을 적정하게 매겨 이적료를 지불한다”며 “팀을 떠나 유럽으로 갔던 선수가 나중에 다시 팀에 돌아와도 큰 무대에서의 경험은 선수나 팀에 도움이 된다”고 했다.
● 45년 전 차범근부터 손흥민, 김민재 등 활약이 밑거름
유럽은 세계 축구의 중심이다. 그중에서도 잉글랜드와 스페인, 이탈리아, 독일, 프랑스 등 유럽 축구 5대 리그는 축구 선수들에겐 이른바 ‘꿈의 무대’로 불린다. 한국은 차범근 전 축구대표팀 감독이 1978년 독일 분데스리가 다름슈타트에 입단하면서 처음으로 유럽 리그에서 뛰는 선수를 보유한 나라가 됐다. 차 전 감독은 이후 프랑크푸르트와 레버쿠젠을 거치면서 분데스리가를 대표하는 공격수로 이름을 날렸다. 허정무 전 축구대표팀 감독도 1980년 네덜란드 리그의 에인트호번에 입단해 3시즌을 뛰었다.
이후로 한동안 뜸하던 한국 선수들의 유럽 진출은 2002년 한일 월드컵을 전후로 다시 활기를 띠었다. 월드컵 이전엔 서정원이 프랑스, 안정환이 이탈리아, 설기현이 벨기에 리그로 진출했다. 한일 월드컵에서 스포트라이트를 받은 박지성 이영표 등의 유럽행이 뒤따랐다. 이천수는 레알 소시에다드와 계약하며 한국 선수로는 처음 스페인 1부 리그 무대를 밟았다. 이들은 ‘더 많은 한국 선수가 유럽에서 뛰면 좋겠다. 더 큰 무대에서 부딪치고 이겨내면서 성장할 수 있다’며 후배들의 유럽 진출을 바랐다.
손흥민(토트넘)과 김민재(나폴리)의 ‘월드 클래스’ 활약도 한국 선수들의 유럽 진출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다. 손흥민은 2021∼2022시즌 EPL에서 아시아 선수 최초로 득점왕에 올랐다. 김민재는 2022∼2023시즌 이탈리아 세리에A에서 ‘올해의 최고 수비수’로 뽑혔다. 유럽과 남미 선수들의 전유물로 여겨졌던 리그 득점왕과 수비왕을 한국 선수가 차지하면서 유럽의 스카우트들은 자연스럽게 제2의 손흥민, 제2의 김민재를 찾는 분위기다. 영국 매체들은 센터백 김지수의 브렌트퍼드 입단 소식을 다루면서 김지수를 ‘제2의 김민재’로 소개하기도 했다.
유럽 리그로 간 한국 선수들에 대한 평가도 전반적으로 좋은 편이다. 울리 슈틸리케 전 한국 대표팀 감독은 “한국 선수들은 잘 훈련돼 있고 배우려는 의지도 강하다. 훈련량도 많고 다른 선수들과 협력도 잘한다”고 평가했다. 특히 한국 선수들은 중국 등 다른 아시아 국가 선수들에 비해 현지 언어와 문화를 배우는 데 적극적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 유럽 진출 선수 위한 체계적 지원 필요
유럽 리그로 진출하는 선수가 늘면서 이들에 대한 체계적인 지원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일본은 자국 선수들의 유럽 진출을 돕기 위해 2017년 일본 통신판매업 기업 DMM이 인수한 벨기에 클럽 신트트라위던을 유럽 진출 전진기지로 활용하고 있다. 유럽에서 통할 만한 선수들을 영입해 적응 기간을 거치게 한 뒤 유럽 빅클럽 도전 기회를 줬다. 지난 시즌 5명의 일본 선수가 신트트라위던에서 뛰었다. 일본축구협회는 2020년 독일 뒤셀도르프에 현지 사무소와 캠프도 열었다.
올해 3월 부임한 위르겐 클린스만 한국 축구대표팀 감독은 “일본은 유럽에 사무실을 두고 유럽파 선수들을 지원한다. 우리도 참고하고 고민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축구계도 유럽파 선수들을 체계적으로 지원할 필요가 있다는 데 공감하고 있다. 대한축구협회 한준희 부회장은 “선수들이 유럽 여러 나라에 진출해 있는 만큼 국가대표 코칭스태프만으로는 선수들을 살피는 데 한계가 있다”며 “선수들을 좀 더 깊게 들여다보는 조직을 만들어 코칭스태프를 돕는 것을 진지하게 생각해볼 만하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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