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유치원(영유) 마지막 해 10월이 되면 서울 강남 엄마들 사이에선 레벨테스트(레테) 전쟁이 치러진다. 흔히 ‘빅3’ ‘빅5’로 유명한 초등 영어학원들이 이때 레테를 통해 예비 초1 수강생을 모집해서다. 레테 수준은 미국 초등학교 5, 6학년에 버금간다. 일반적인 공부로는 따라갈 수 없어 영유 말고도 월 수백만 원의 과외를 받거나 프렙(준비) 학원까지 다녀야 할 판이다. 이 레테를 대치동에선 ‘7세 고시’로 부른다.
▷7세 고시를 위해선 영유 단계부터 ‘스파르타식’ 영어 교육을 받는 것이 기본이다. 영유 입학은 4, 5세가 일반적이다. 영유 수요가 워낙 많아 이 또한 레테를 치러야 한다. 영유의 레테는 영어 단어를 발음할 수 있는지, 단어에서 빠진 철자를 쓸 수 있는지 등을 본다. 유명 영유에 입학시키기 위해선 두세 달씩 원어민 강사까지 붙여 한나절 이상 공부시키기도 한다. 이 레테를 ‘7세 고시’에 빗대 ‘4세 고시’ 또는 ‘초시’라고 부른다.
▷4세 고시는 영어 실력 외에도 준비해야 할 것이 많다. 제 앞가림도 잘 못하는 어린 나이여서 시험 자체를 치를 수 있게 준비하는 훈련이다. 기저귀를 떼고 대소변을 가리는 훈련, 엄마 없이 20∼30분을 혼자 앉아 있는 훈련, 악력이 약해 제대로 글씨를 쓸 수 없기 때문에 어른이 같이 손목을 잡고 알파벳을 쓰는 연습 등이다. 아이 입장에서 보면 한계를 극복하라는 듯한 강도 높은 훈련의 연속인 셈이다.
▷4세까지 사교육 출발점이 내려간 데는 물론 두려움과 경쟁을 조장하는 사교육 마케팅이 한몫한다. “남들은 이만큼 앞서가는데 바라만 보실 건가요”라는 학원 관계자의 말이 부모로선 가장 무섭다. 전문가들이 유아기에 언어의 주입식 학습은 뇌 균형 발달을 저해한다고 경고해도 당장 눈앞에 ‘영어를 잘하는 아이’를 보고 싶은 것이 부모 심리다. 보통 영유의 월 교습비가 기본 180만∼200만 원인데 과외 등 추가 비용을 합치면 300만 원 가까이 들어간다고 한다. 허리 휘는 부담에도 영유에 보내는 건 혼자만 경쟁의 급행열차에서 내리기 어렵기 때문이다.
▷어린 나이에 부모의 욕심과 강요에 의해 사교육을 받다 보니 부모와 자식 사이가 틀어지기 쉽다. ‘엄마가 맨날 공부만 시킨다고 짜증 낸다’ ‘숙제를 계속 미루며 안 한다’ 등을 호소하는 글을 맘카페에서 흔히 볼 수 있다. 아이와 부모 모두 힘겹게 ‘4세 고시’ ‘7세 고시’를 통과해도 초3 때 의대 입시반이나 초교 졸업 전 학원 입학 등 끝이 잘 안 보이는 레테 경쟁이 이어진다. 지금 어린이들이 크면 만개할 인공지능(AI) 시대에 의대와 명문대 입학을 목표로 한 입시 경쟁이 과연 유효할지 의심스럽다. AI 번역기가 발전하면 영어 잘하는 한국인보다 남들과 다른 생각을 하는 인재가 필요할 텐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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