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기 660년 7월 백제 사비성은 화염에 휩싸였다. 최후의 보루로 여겼던 계백 장군의 5000 결사대마저 황산벌에서 패배했고, 나당연합군의 협공에 백제는 나라의 역량을 제대로 펼치지 못한 채 우왕좌왕하다가 며칠 만에 항복하고 말았다.
늘 수준 높은 문화강국을 자부하던 백제의 최후는 이처럼 너무나 허망했다. 백제 백성들은 나라를 되살리려 부흥 운동에 나섰지만 대세를 되돌릴 수는 없었다. 그들은 신라 백성으로 살아야만 하는 현실을 인정하면서도 오랫동안 백제를 잊지 못했다. 옛 백제 땅에 남겨진 몇 점의 석조물에는 백제 패망의 역사가 생생히 새겨져 있다.
백제 정림사 석탑 훼손한 당나라군
7월 12일 침략군이 사비성을 에워싸자 의자왕은 이튿날 야음을 틈타 웅진성으로 도주했다가 닷새 만에 항복했다. 사비성과 그 일원에는 점령군이 가득했고 그들은 마음껏 백제를 약탈했다. 궁궐 내 전각과 창고는 말할 것도 없고 약탈의 손길은 왕릉과 사찰로 번져 나갔다.
1992년에 우연히 발굴된 충남 부여 능산리의 한 절터에서는 건물이 불에 타면서 지붕의 기왓장들이 폭삭 내려앉은 모습으로 드러났다. 목탑 터를 발굴하는 과정에서는 도끼날에 수없이 찍혀 절단된 목탑 중심 기둥과 함께 불사리장엄구는 약탈되고 그것을 봉안했던 석제 사리감만이 도괴된 채 확인됐다.
이 절의 이름은 전해지지 않으나 창왕이 부왕인 성왕의 명복을 빌며 창건한 것이 분명한데 그곳을 약탈한 것이다. 이 절터에 대한 발굴 과정에서 놀라운 유물이 발견됐다. 금당 터 뒤쪽 자그마한 구덩이 속에서는 다급히 묻은 것으로 보이는 백제금동대향로가 출토되었다. 아마도 절의 스님들이 절체절명의 순간에 최고의 보물을 땅속에 숨긴 것으로 보인다.
당나라 군대의 만행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소정방은 ‘대당평백제국(大唐平百濟國)’으로 시작하는 자신의 기공문을 8월 15일자로 작성해 백제 핵심 사찰 정림사의 석탑 1층 몸돌에 새기도록 명했다. 마치 신라의 황룡사처럼 백제인들이 성소(聖所)로 여기며 나라와 자신들의 안녕을 빌었던 정림사 석탑을 무자비하게 훼손한 것이다.
정복지에 비석 형태로 자신의 기공을 세우는 경우는 많지만 이처럼 많은 사람들의 존숭을 받던 성소에 개인의 기공을 새긴 사례는 매우 드물다. 같은 내용의 기공문은 원래 부소산 자락에 있다가 현재 국립부여박물관으로 옮겨진 석조(石槽)에도 새겨져 있다.
폐위된 왕 위한 비석 세운 백제 유민들
사비성이 함락되고 의자왕이 항복했지만 백제 백성들은 쉽사리 나라를 내어주려 하지 않았다. 그들은 저마다 병장기를 부여잡고 부흥 운동에 나섰다. 백제부흥군의 초반 위세는 실로 대단했으나 예봉이 차츰 꺾이면서 결국 백제를 되살리려는 꿈은 실패로 돌아갔다. 그러나 백제 유민들의 마음속에는 여전히 ‘백제’가 굳건히 자리하고 있었다. 그것을 보여주는 석조 유물 몇 점이 남아 전한다.
1960년 여름의 일이다. 동국대 황수영 교수는 방학을 맞아 충남 연기군(현 세종시) 본가로 돌아가는 불교대 학생에게 한 가지 부탁을 했다. 비암사라는 절 뜰 돌에 특이한 불상이 있다고 하니 직접 가서 세부 정보를 확인해 달라는 청이었다. 방학이 끝난 다음 학생이 건넨 탁본을 보는 순간 황 교수는 전율했다. 여러 면에 크고 작은 불상이 빼곡히 조각되어 있었고 불상 주위에는 마치 비석처럼 불상을 조성하게 된 시점과 연유, 그리고 참여자의 관등과 이름 등이 새겨져 있었기 때문이다.
황 교수는 며칠 후 비암사를 직접 찾아 조사를 거쳤고 그 내용을 토대로 이 불비상들은 국보로 지정되었다. 이듬해 여름까지 비암사에서 멀지 않은 서광암, 연화사, 민가에서 4기의 불비상이 더 확인되었고 후속 연구에서 이 일군의 불비상은 백제 멸망 후 연기 지역 백제 유민들이 조성한 것으로 밝혀졌다.
그 가운데 계유명 전씨 아미타불비상은 비암사에 봉안 중이던 3구의 불비상 가운데 하나인데, 계유년인 서기 673년에 전씨(全氏) 등이 국왕, 대신, 칠세부모(七世父母), 중생을 위해 절을 짓고 불상을 조성한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백제의 관등인 달솔(達率)과 함께 신라 관등인 내말(乃末), 대사(大舍) 등의 관등명이 함께 확인된다.
계유명 삼존 천불비상은 비암사에서 멀지 않은 한 암자에 봉안되어 있었는데, 정면에 삼존불이 조각되었고 전면에 걸쳐 900구 이상의 작은 불상이 빼곡히 새겨져 있다. 삼존불의 좌우에 남겨진 여백에는 계유년에 진모씨(眞牟氏) 등 250여 명이 국왕, 대신, 칠세부모 등을 위하여 이 불상을 만들었다는 내용이 새겨져 있다.
이 2구의 불비상이 만들어진 것은 백제 부흥 운동이 끝난 지도 10여 년이나 흐른 시점이다. 그때에 이르러 연기 지역의 불교 신도 다수가 발원하여 이미 멸망한 백제의 국왕과 대신, 그리고 자신들의 조상을 위해 이 불비상을 만든 것이다. 이미 신라의 지방민으로 편제되었지만 그들은 백제를 잊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끝내 신라로 스며들지 못한 백제인들
삼한일통을 이룬 신라의 당면 과제는 고구려와 백제 등 패망국 백성들을 위무하여 나라의 토대를 단단하게 만드는 일이었다. 전국을 9개의 주(州)로 나누면서 옛 백제 땅에도 3개의 주를 설치했고 백제 유민들에게도 관등을 부여했다.
그러나 그런 정책에도 불구하고 백제 유민들은 온전히 신라의 백성으로 스며들지 못한 것 같다. 신라의 힘이 약해졌을 때 그러한 의식이 폭발하여 후백제를 탄생시키거나 신라가 멸망한 후 옛 백제 땅에 정림사지 석탑을 모방한 탑들이 다수 세워진 점이 그러한 사실을 웅변한다.
이처럼 옛 석조물 몇 점에도 백제 패망사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근래 부여 시가지 곳곳에서 발굴이 한창이며 신자료들이 속속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아직 백제의 궁궐이 어디에 어떤 모습으로 존재했는지, 도시 구조는 어떠했는지조차 제대로 알지 못하는 것이 현실이다. 장차 정밀한 조사와 연구를 통해 ‘사라진 왕국 백제’에 새로운 조명이 가해지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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