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철 복통 치료에 좋은 ‘노야기’[이상곤의 실록한의학]〈137〉

  • 동아일보
  • 입력 2023년 7월 13일 23시 3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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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뭇잎들이 축 늘어져서 허덕허덕하도록 더웁다. 이렇게 더우니 시냇물인들 서늘한 소리를 내어 보는 재간도 없으리라.” 시인 이상은 수필 ‘권태’에서 한여름의 무더위를 이렇게 표현했다. 하지만 내 어린 시절을 돌아보면 낮 더위는 힘들었어도 여름밤은 그래도 낭만이 있었다. 멍석 위에 모여 앉아 칼국수를 먹고, 늦어지는 달밤에 쑥 모깃불의 매캐한 연기에 취했던 추억은 아직도 생생하다.

이상곤 갑산한의원 원장
이상곤 갑산한의원 원장
에어컨도 냉장고도 자동차도 없던 조선시대, 그냥 맨몸으로 무더위와 맞서는 일은 왕에게도 곤욕이었다. 더위를 먹어 생기는 서증(暑症)은 단골 질환이었다. 조선유학의 금과옥조로 불리며 신하들과 경전을 읽으며 토론하는 경연도 더위에는 휴강했다. 특히 열이 많은 가족력을 가진 조선의 왕들은 종기와 소갈(消渴), 서증을 자주 앓았다. 동의보감은 서증을 이렇게 규정했다. “몸에서 열이 나고 저절로 땀이 나며 입이 마르고, 복통으로 곽란이 있으나 몸이 아프지는 않다.”

늘 소화불량으로 고생했던 영조는 여름이면 서증으로 잦은 복통을 호소했다. 한번은 영조가 “배가 아파 앉아 있기조차 불편하다”고 하자 어의는 “성상의 증후가 대체로는 서증(暑症)인데 필시 내상(內傷)을 입었기 때문이니 날것과 찬 것을 각별히 조심하는 게 어떻겠습니까?”라고 진언한다. 하지만 영조는 “찬 것을 먹지 않기는 힘들다”고 단박에 거절한다. 어의는 할 수 없이 “매운 후추로 속을 데워 복통을 없애자”고 제안해 겨우 치료를 허락받는다.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의 죽음을 목격한 이후 화증(火症)이 생겨 여름 나기를 무척 힘들어했다. 여름이 시작되면 바로 서증을 예방하는 약을 수시로 복용했다. 정조는 재위 첫해 총신(寵臣) 홍국영에게 “청서육화탕(淸暑六和湯)을 먹은 지 오래되었으니, 이제 심신탕(心腎湯)을 다시 먹어도 무방할 것”이라고 말한다.

정조가 말한 ‘청서육화탕’은 복통을 치료하는 탕제로 주요 약물은 향유(香薷)다. 더운 여름 찬 음식이나 상한 음식 등으로 복통 설사가 잦거나 소화불량 증상이 생길 때, 또는 더위에 지쳐 몸이 붓고 소화도 되지 않으며 몸이 차고 머리도 아플 때 쓰는 치료 약물이다. 향유에 함유돼 있는 아피게닌, 이파닌, 루테오린 등의 휘발성 정유 성분은 광범위한 항균 및 살균 기능이 있으며 소화액의 분비를 자극하고 위장의 운동을 촉진하는 작용도 한다. 신장으로 가는 혈액의 양을 늘려 몸에 나쁜 성분을 빨리 소변으로 나가게 하는 이뇨 기능도 있다.

향유는 한마디로 위장의 습기를 소변으로 배출해 장마철 외부의 습기나 과다 섭취한 음료에 생긴 수독(水毒)을 없애준다. 향유는 우리말로 ‘노야기’다. 동의보감은 복통이나 식욕 저하에 이 약을 민간요법으로 추천했다. 조선시대의 서증은 요즘 한여름 아이스크림이나 찬 음료를 많이 먹어 생기는 설사나 복통, 한랭성 알레르기비염과 마찬가지라 볼 수 있다. 그러고 보면 향유는 지금 시절에 딱 맞는 제철 약물인 셈이다. 차 마시듯 달여 먹으면 효험이 크다.

오경 중의 하나인 ‘예기(禮記)’에서 “‘예(禮)’란 일이 생기기 전에 대비하는 것이고 ‘법(法)’은 일이 생긴 후에 대처하는 것”이라고 했다. 한의학은 아직 일어나지 않은 질환을 다스리는 예방에 가장 큰 가치를 둔다. ‘황제내경’에 “혹서기가 다가오면 체력 고갈을 대비해 미리 더위 예방약을 먹어야 한다”고 했는데, 거기에 매번 등장한 처방이 청서익기탕(淸暑益氣湯)이었다. 준비성 강한 영조가 여름 전부터 미리 복용한 처방이며, 조선왕들이 29번이나 처방하였다. 더위에 지쳐 아무런 의욕이 없는 이들에게 추천할 만한 처방이다.

#여름철#복통#노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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