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 아래에서 읽은 편지[관계의 재발견/고수리]

  • 동아일보
  • 입력 2023년 7월 13일 23시 45분


어느 책방에서 특별한 시간을 보냈다. 처음 만난 사람들과 둘러앉아 편지를 썼다. 필명을 정해 정성껏 편지를 쓰고 나눠 가지는 우연한 편지 쓰기 모임. 누가 누구의 편지를 갖게 될지는 전혀 알 수 없었다. 때론 모르는 사람에게나 털어놓을 수 있는 속내가 있고, 처음 만난 사람에게만 전할 수 있는 진심도 있으니까. 낯선 사람들과 한 번쯤 그런 얘길 나눠보고 싶었다.

고수리 에세이스트
고수리 에세이스트
달빛 환한 여름밤, 돌아가는 길에 연애편지를 받은 듯 마음이 들떴다. 내 편지는 누구에게 갔을까. 나에겐 어떤 편지가 도착했을까. 그만 참지 못하고 가로수 아래 멈춰 서서 편지를 꺼내 열었다. 왈칵 울 뻔했다. ‘사랑하는 나의 딸에게.’ 연필로 빼곡하게 써 내려간 어느 엄마의 편지였다.

‘딸아. 엄마는 요즘 시간에 대해 생각한단다. 누구보다 열심히 살아온 것 같은데, 무언갈 해낸 것도 같은데, 그 시간이 내가 되고 너희가 되었다는데. 어째서 지나간 시간을 쥐어보자면 손바닥이 텅 빈 것만 같을까. 내가 살아온 시간은 모두 어디로 가 버린 걸까.’

옆자리에서 편지를 쓰던 한 선생님의 얼굴이 스쳤다. 이런 책방 모임은 처음 와 본다며 나이가 너무 많아 쑥스럽다던 그는 가장 마지막까지 진지하게 편지를 썼다. 한 사람 인생의 시련과 회한과 다짐이 담긴 편지 세 장을 나는 우두커니 선 채로 읽었다. 이따금 바람이 불었다. 머리 위로 플라타너스 나뭇잎이 사락사락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다. 마치 내 머리를 쓰다듬듯이 사락사락. ‘엄마는 새롭게 살기를 원한다. 지난 세월은 모두 흘려보내고 지금부터 나를 통과해 가는 시간은 자유롭게 나로 살고 싶구나. 엄마는 마음먹었단다. 무엇보다 내년에 더욱 울창해지기로.’

편지에는 문정희의 시 ‘나무학교’가 단정한 필체로 적혀 있었다. ‘나무는 나이를 겉으로 내색하지 않고도 어른이며/아직 어려도 그대로 푸르른 희망/나이에 관한 한 나무에게 배우기로 했다/그냥 속에다 새기기로 했다/무엇보다 내년에 더욱 울창해지기로 했다’

잠시 나는 편지 속 딸이 되어 마음으로 답장을 보냈다. ‘누구 엄마가 아닌 당신 자신으로 살아갈 인생을 지지해요’라고. 한 사람의 나이테를 생각한다. 덧없이 흘러간 시간은 그대로 흘려보내고 새로이 자유롭게 나로 살겠다는 사람의 둥그렇고 부드러운 마음의 모양. 나이테는 한자로 ‘연륜(年輪)’이라고 쓴다던데, 나무는 나이테가 생길수록 더 단단해지듯이 사람도 시련과 고뇌를 겪으며 연륜을 쌓으며 단단해지는 거 아닐까. 그 밤, 커다란 플라타너스 가로수 아래 나 홀로 서서 다짐하듯 따라 읽었다. ’무엇보다 내년에 더욱 울창해지기로 했다.’

#편지 쓰기#엄마의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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