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책방에서 특별한 시간을 보냈다. 처음 만난 사람들과 둘러앉아 편지를 썼다. 필명을 정해 정성껏 편지를 쓰고 나눠 가지는 우연한 편지 쓰기 모임. 누가 누구의 편지를 갖게 될지는 전혀 알 수 없었다. 때론 모르는 사람에게나 털어놓을 수 있는 속내가 있고, 처음 만난 사람에게만 전할 수 있는 진심도 있으니까. 낯선 사람들과 한 번쯤 그런 얘길 나눠보고 싶었다.
달빛 환한 여름밤, 돌아가는 길에 연애편지를 받은 듯 마음이 들떴다. 내 편지는 누구에게 갔을까. 나에겐 어떤 편지가 도착했을까. 그만 참지 못하고 가로수 아래 멈춰 서서 편지를 꺼내 열었다. 왈칵 울 뻔했다. ‘사랑하는 나의 딸에게.’ 연필로 빼곡하게 써 내려간 어느 엄마의 편지였다.
‘딸아. 엄마는 요즘 시간에 대해 생각한단다. 누구보다 열심히 살아온 것 같은데, 무언갈 해낸 것도 같은데, 그 시간이 내가 되고 너희가 되었다는데. 어째서 지나간 시간을 쥐어보자면 손바닥이 텅 빈 것만 같을까. 내가 살아온 시간은 모두 어디로 가 버린 걸까.’
옆자리에서 편지를 쓰던 한 선생님의 얼굴이 스쳤다. 이런 책방 모임은 처음 와 본다며 나이가 너무 많아 쑥스럽다던 그는 가장 마지막까지 진지하게 편지를 썼다. 한 사람 인생의 시련과 회한과 다짐이 담긴 편지 세 장을 나는 우두커니 선 채로 읽었다. 이따금 바람이 불었다. 머리 위로 플라타너스 나뭇잎이 사락사락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다. 마치 내 머리를 쓰다듬듯이 사락사락. ‘엄마는 새롭게 살기를 원한다. 지난 세월은 모두 흘려보내고 지금부터 나를 통과해 가는 시간은 자유롭게 나로 살고 싶구나. 엄마는 마음먹었단다. 무엇보다 내년에 더욱 울창해지기로.’
편지에는 문정희의 시 ‘나무학교’가 단정한 필체로 적혀 있었다. ‘나무는 나이를 겉으로 내색하지 않고도 어른이며/아직 어려도 그대로 푸르른 희망/나이에 관한 한 나무에게 배우기로 했다/그냥 속에다 새기기로 했다/무엇보다 내년에 더욱 울창해지기로 했다’
잠시 나는 편지 속 딸이 되어 마음으로 답장을 보냈다. ‘누구 엄마가 아닌 당신 자신으로 살아갈 인생을 지지해요’라고. 한 사람의 나이테를 생각한다. 덧없이 흘러간 시간은 그대로 흘려보내고 새로이 자유롭게 나로 살겠다는 사람의 둥그렇고 부드러운 마음의 모양. 나이테는 한자로 ‘연륜(年輪)’이라고 쓴다던데, 나무는 나이테가 생길수록 더 단단해지듯이 사람도 시련과 고뇌를 겪으며 연륜을 쌓으며 단단해지는 거 아닐까. 그 밤, 커다란 플라타너스 가로수 아래 나 홀로 서서 다짐하듯 따라 읽었다. ’무엇보다 내년에 더욱 울창해지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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