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여름 할리우드 기대작으로 꼽히는 영화 ‘오펜하이머’의 영국 런던 시사회는 지난주 배우들 없이 진행됐다. 맷 데이먼, 에밀리 블런트,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 등 스타 배우들이 레드카펫에서 사진만 찍고 사라진 것이다. 홀로 무대에 오른 감독은 “그들은 피켓을 들기 위해 떠났다”고 했다. 14일 자정을 기해 시작된 미국 배우·방송인노동조합의 총파업에 배우들이 동참한다는 설명이었다. 배우조합은 지난달부터 디즈니, 유니버설, 넷플릭스 등을 대표하는 영화·TV제작자연맹과 고용계약 협상을 벌였지만 결국 결렬됐다.
▷앞서 5월부터 미국 작가조합이 파업에 들어간 데 이어 배우, 스태프 등 16만여 명이 몸담은 배우조합까지 파업을 결의하면서 세계 최대 영화산업 메카인 할리우드가 멈춰섰다. 두 노조의 동반 파업은 매릴린 먼로가 참여하고 로널드 레이건 전 대통령이 배우조합장으로 있던 1960년 이후 처음이다. TV 산업 초창기였던 당시 작가와 배우들이 방송국에 판매된 영화 재상영 분배금 문제를 놓고 함께 싸웠다면, 이번엔 할리우드 판도를 뒤흔들고 있는 스트리밍과 인공지능(AI)을 두고 뭉쳤다.
▷동영상 스트리밍 시대가 열리면서 넷플릭스, 애플, 디즈니 같은 콘텐츠 플랫폼 기업은 배를 불리고 있지만 정작 콘텐츠 생산자인 작가와 배우들은 합당한 로열티를 받지 못한다는 게 양대 조합의 주장이다. 하지만 이들이 더 우려하는 건 AI가 잠식할 할리우드의 미래다. 앞으로 생성형 AI가 대본을 쓰고, AI 딥페이크 기술이 배우의 신체와 연기를 대체하면서 이들의 직업이 폐기 처분될 수 있다는 것이다.
▷우려는 이미 현실이 되고 있다. 지난해 실어증으로 은퇴한 ‘다이하드’ 배우 브루스 윌리스는 자기도 모르는 새 전성기 모습을 이용한 딥페이크 광고가 만들어져 논란이 됐다. 마블의 신작 ‘시크릿 인베이젼’ 오프닝 영상은 아예 AI가 만들었다. 작가조합이 제작자들에게 AI를 활용한 대본 작성과 수정을 금지해 달라고 요구하고, 배우조합이 배우의 얼굴과 목소리가 AI에 무단 도용되는 걸 막아 달라고 요구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AI의 진화로 일자리를 위협받게 된 콘텐츠 생산자들이 반격에 나서는 건 할리우드뿐만이 아니다. 작가, 예술가 등 14만여 명이 속한 독일 협회와 노동조합은 AI가 저작권을 침해하고 있다며 유럽연합에 AI 규정 강화를 촉구했다. 영국 배우조합도 AI 때문에 배우들 일자리가 없어진다며 파업을 예고했다. 국내 최대 웹툰 플랫폼에선 AI 보이콧 운동이 벌어지기도 했다. 생성형 AI가 상용화된 지 1년도 되지 않아 벌어진 일들이다. AI가 ‘예술가의 종말’을 부를지에 대한 논쟁은 63년 만의 ‘할리우드 셧다운’으로 더 뜨거워지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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