렘브란트 판레인(1606∼1669)은 미술사에서 네덜란드 황금기를 대표하는 화가입니다. 평생 회화 300점, 에칭(판화) 300점, 드로잉 2000점을 남겼는데, 그중에서도 자화상을 40여 점이나 남긴 것이 독특합니다.
렘브란트가 그린 자화상 중 그가 세상을 떠나기 몇 달 전 그린 작품이 한국에서 전시되고 있습니다. 국립중앙박물관 내셔널갤러리 명화전에 출품된 ‘63세의 자화상’(1669년)입니다. 평생을 치열하게 살다 마지막을 눈앞에 두고 있었던 화가의 모습은 어땠을까요? 그림을 통해 자세히 만나보겠습니다.
34세 예술가의 패기
작품 속 렘브란트는 단출한 모습입니다. 모자와 깃에 수가 놓인 재킷을 입고 있지만, 어둠 속에서 빛나는 것은 그의 얼굴과 흰 머리, 그리고 옷깃 일부분일 뿐입니다.
이 그림을 X선으로 촬영한 사진에서는 그가 손에 붓을 들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그런데 최종 작품에서는 그것조차 사라지고, 손을 조용히 모은 채 앞을 응시하는 남자만이 남아 있습니다.
63세의 자화상을 좀 더 자세히 보기 전에, 극명한 대비를 이루는 작품을 한번 보겠습니다. 렘브란트가 34세일 때 그렸던 1640년 자화상입니다. 이번 한국 전시에는 출품되지 않았지만 영국 내셔널갤러리가 소장한 이 작품에서 렘브란트의 포즈와 표정은 비슷하지만, 나머지는 완전히 다릅니다.
34세 렘브란트는 장식이 달린 멋진 모자를 쓰고 흰 주름이 잡힌 고급스러운 셔츠에 벨벳과 모피로 장식된 재킷을 입고 있습니다. 이때 렘브란트는 네덜란드의 가장 인기 있는 초상화가로 자신만만한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흥미롭게도 그가 입고 있는 옷과 장식은 이 작품이 그려진 1640년대가 아니라 100년 전인 1520년대 스타일이라고 합니다. 이 시기는 수많은 예술가가 동경했던 르네상스 예술이 정점에 달할 무렵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레오나르도 다빈치, 미켈란젤로, 라파엘로가 왕성하게 활동했던 1490년대부터 1527년까지를 ‘하이 르네상스’라고도 부릅니다.
또 그가 팔을 걸치고 있는 난간은 티치아노의 작품에서, 또 전체적인 인물의 분위기는 르네상스 거장인 뒤러나 라파엘로의 초상화를 떠올리게 합니다. 렘브란트는 이 자화상을 그릴 무렵 대가들의 작품을 보고 따라 그리기도 했기에 그 영향이 물씬 배어납니다.
특히 의미심장한 건 렘브란트가 참고한 티치아노의 작품이 이탈리아 시인 루도비코 아리오스토를 그린 것으로 추정된다는 점입니다. 화가보다 더 높은 지위를 가진 것으로 여겨졌던 시인의 복장과 포즈를 차용해 스스로를 표현하면서 34세 렘브란트는 젊은 패기와 자신감을 뛰어난 기교와 함께 거침없이 드러내고 있습니다.
있는 그대로, 후회는 없다
이제 다시 63세의 자화상을 보겠습니다. 나를 보여주기 위해 치장했던 화려한 모든 것들이 물러나고, 오른쪽 얼굴과 이마만 환한 빛을 받고 있습니다. 보석 달린 모자에 가려졌던 검은 머리칼은 이제 은발이 되었습니다. 정면을 똑바로 응시했던 야심에 찬 눈빛은 깊이 관조하는 눈빛으로 바뀌었습니다.
성공한 화가였던 렘브란트가 이 자화상을 그렸을 때는 경제적인 어려움에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30대 때 렘브란트는 당시 평균 집값의 10배가 넘는 고급 주택을 매입하고, 르네상스 거장들의 드로잉을 수집하며 마음껏 취향을 즐기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다 1656년 그린 대작 ‘야경’이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하면서 수입도 줄어들게 됩니다. 이해 렘브란트는 파산을 신청하고 자신이 수집했던 예술품, 그릇, 조각, 보석 등 모든 것을 경매에 넘깁니다.
이 모든 것을 겪고 난 화가의 얼굴은 그러나 놀랍도록 차분합니다. 심지어 듬성듬성해진 눈썹과 입가의 수염까지도 자세히 묘사했죠. 이 작품에서는 특히 물감을 두껍게 쌓아 올려 처진 피부를 입체적으로 표현했습니다. 또 얼굴 피부에 감도는 회색, 흰색, 보라, 분홍과 노랑을 투명하게 드러내고 있습니다.
렘브란트는 어떤 마음으로 이 자화상을 그렸을까요. 젊은 시절 어떤 자화상들은 컬렉터에게 판매하기 위해 그린 것도 있었고, 앞서 본 34세의 자화상은 예술가로서 패기를 드러내고자 했습니다. 이 자화상에서 렘브란트는 붓도 팔레트도 던져버리고 자신의 얼굴을 냉정하게 들여다보고 있습니다. 그 얼굴 속에 담긴 인생의 여러 순간을 하나하나 되짚어보는 것처럼 말입니다.
파산해서 화려한 모든 것들을 떠나보내고, 생계유지를 위해 그림 도구만 겨우 지키게 된 렘브란트는 불행했을까요. 삶의 마지막 순간을 앞둔 그의 표정에서 그런 불행의 감정이나 후회는 전혀 보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주어진 때에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했고, 그것이 준 고통이나 슬픔이 만든 깊은 주름까지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는 듯합니다.
화려한 성공과 부와 명예를 거머쥐는 것만이 아니라, 삶의 진정한 순간들을 표현하고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이 예술이기에 렘브란트가 남긴 작품들은 시공간을 뛰어넘어 감동을 주고 있습니다. 나이 든 화가는 자신이 그런 이야기를 남기고자 최선을 다했음을, 말년의 소박한 자화상을 통해 보여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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