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창성을 유난히 강조하는 시대지만, 예술은 본질적으로 다른 예술가들의 것을 빌리는 행위다. 줄리아 크리스테바의 말대로 모든 작품은 순수한 창작이 아니라 “인용의 모자이크”인지 모른다. 김소진 작가의 ‘자전거 도둑’은 이탈리아 영화감독 비토리오 데시카의 ‘자전거 도둑’을 차용했다는 사실을 감추지 않는다.
2차 세계대전 직후의 로마를 배경으로 하는 영화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초점을 맞춘다. 안토니오의 가족도 그런 사람들이다. 안토니오는 영화 포스터를 벽에 붙이는 일자리를 얻게 된다. 자전거를 타고 돌아다니며 하는 일인데, 첫날에 자전거를 도둑맞는다. 어렵게 도둑을 잡지만 자전거는 어딘가로 빼돌려지고 없다. 절망적이다. 결국 그는 다른 사람의 자전거를 훔치다가 붙잡힌다. 그런데 그가 끌려가는 모습을 아들 브루노가 목격한다. 자전거 주인이 아들 앞에서 수모를 당하는 그를 가엾이 여겨 풀어주지만 아버지의 권위는 바닥에 떨어졌다.
김소진 작가의 소설은 영화에서 두 개의 상처를 짚어낸다. 하나는 아들 앞에서 망신당한 안토니오의 상처이고, 더 큰 하나는 아버지의 연약한 모습을 목격한 브루노의 상처다. 소설의 화자는 영화에 나오는 부자가 자신과 아버지를 닮았다고 고백한다. 그의 아버지는 구멍가게를 하면서 도매상 주인의 부당한 폭력에 시달렸다. 주인의 요구로 주인 앞에서 죄 없는 아들의 뺨까지 때려야 했다. 아들은 그것을 목격해야 했다. 여기까지는 영화와 소설이 비슷하다.
그런데 다른 점이 있다. 영화 속의 아들은 어깨가 처진 아버지의 손을 따뜻하게 잡아주지만, 소설 속의 아들은 아버지의 무기력한 모습에 “죽는 한이 있더라도 애비라는 존재는 되지 말자”고 다짐했다. 상처를 대하는 모습이 사뭇 다르다. 그런데 돌아보면 그의 아버지를 비참하게 만든 건 가난과 시대였다. 우리의 아버지들이 종종 그러했던 것처럼. 그래서일까, 소설에는 그의 아버지, 아니 우리의 아버지들에 대한 뒤늦은 죄의식, 뒤늦은 연민이 어른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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