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대 인기가 식을 줄 모른다. 공부를 잘하는 학생들 중 열에 여덟 아홉은 의대를 지망한다고 해도 과장이 아닐 정도니, 우리나라 모든 의대가 전국 상위 1%의 학생들로 채워져 있다고 해도 틀리지 않을 것이다. 똑똑한 학생들이 앞다투어 의대에 입학하니 우리나라 보건의료가 나날이 발전해야 할 텐데, 현실은 정반대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것처럼 우리나라 필수의료와 지역의료는 속절없이 무너져 내리고 있다.
잊을 만하면 신문에 등장하는 ‘응급실 뺑뺑이’, 20%에도 미치지 못하는 소아청소년과 전공의 지원율, 수도권 대형병원 환자 쏠림, 수억 원의 연봉 제시에도 의사를 구하지 못하는 지방의료원의 현실 등은 우리나라 필수·지역의료의 위기를 가감 없이 보여주는 현상들이다.
필수의료를 담보하고 지역별 의료서비스 불균형 해결의 구심점이 되어야 할 곳은 ‘권역책임의료기관’의 대부분을 맡고 있는 국립대병원들이다. 그렇지만 이들은 재정 운용과 인력 확보에서 심각한 어려움을 겪고 있다.
서울대병원을 포함한 17개의 국립대병원들은 공공기관운영법에 의해 ‘기타공공기관’으로 분류되어 예산과 정원 모두 정부의 관리와 감독을 받는다. 웬만한 규모의 시설을 개·보수하거나 주요 의료장비를 구입할 때 일일이 정부의 심의를 거쳐야 한다. 어렵사리 허가를 받더라도 정부의 예산 지원은 총액의 25%에 불과하다. 이러니 여러 국립대병원들이 수술용 로봇 같은 최신 의료장비 구입은커녕 너무 낡아 비가 새는 건물 고치기도 어렵다고 호소한다. 기부금을 모아 부족한 재정을 채워 보려고 해도 적극적인 모금이 금지되어 있다. 이런 족쇄들이 풀려야 국립대병원이 살아날 수 있다.
인력 문제는 더 심각하다. 실손보험으로 인해 비급여 진료 분야가 팽창되면서 1, 2차 의료기관에서 일하는 의사들과 대학병원 교수들의 급여 차이가 점점 벌어진다. 그러니 촉망받던 젊은 의사가 개원가를 선택하는 것이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며, 명의로 이름을 떨치던 교수가 대학병원을 사직하고 개원하는 일도 이제는 드물지 않다. 몸과 마음이 고된 필수의료 분야는 아예 전공의 모집부터 어렵다. 이런 현상은 지방 국립대병원에서 더욱 심각한데, 전체 예산과 인건비 책정의 자율성이 없으니 속수무책이다. 대통령 직접 지시가 아니었다면 현재 진행 중인 어린이병원의 인력 증원도 불가능했을 것이다.
물론 국립대병원 교수의 급여가 비급여 분야에서 주로 일하는 의사들과 같은 수준일 수는 없다. 그렇지만 연구에 집중할 수 있는 여건과 최소한의 삶의 질은 보장되어야 우수한 인재를 확보할 수 있다. 10군데의 연구중심병원 중 국립대병원은 서울대병원과 경북대병원 단 두 곳뿐이고, 2021년 국가 연구개발(R&D) 예산 27조4005억 원 중 비수도권 국립대병원들이 받은 지원액은 모두 338억 원에 불과했다. 대대적인 연구인프라 확충과 대규모 연구비 투자 없이는 국립대병원을 살리기 어렵다. 만성적인 인력 부족으로 인한 교수들의 육체적, 심리적 소진도 큰 문제다. 다른 학과의 교수들이 당연히 누리는 연구년을 국립대병원 교수들도 누릴 수 있어야 하고, 타 직종에서 일반화된 육아휴직도 눈치 보지 않고 사용할 수 있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적정 인력 확보가 필수적이다. 정부가 필수의료 분야를 중심으로 국립대병원 교수 인력을 대폭 증원하여 문제 해결을 위한 확실한 의지를 보여주길 기대한다.
또 한 가지 중요한 것은 지역에서 필수의료에 평생 헌신할 인재를 길러내는 일이다. 정부가 의대 정원을 늘리기로 결정했다면, 의료인 숫자가 적은 지역의 의과대학 위주로 지역인재전형 정원을 증원해야 한다. 이 전형을 통해 입학한 학생들이 졸업 후 고향에 남아서 일하는 경우가 타 지역 출신보다 지금도 더 많지만, ‘지역필수인재전형’으로 강화하여 졸업 후 일정 기간 해당 지역 필수의료 분야에서 근무하게 하는 좀 더 적극적인 정책도 고려하자. 의대 지망생이 넘쳐나는 지금이 적기다.
정부는 국립대병원이 중심이 되는 필수·지역의료 전달 체계를 확립하려고 한다. 그러려면 무엇보다 국립대병원이 살아나야 한다. 재정과 인력 모두에서 큰 어려움에 처한 국립대병원들이 위기를 극복해낼 수 있을지 여부는 전적으로 정부의 의지에 달려 있다. 기업인이며 자선가인 빌 게이츠도 인정한 것처럼, 중대한 문제의 해결에는 결국 정부의 역할이 가장 중요하다. 각종 규제로 손발을 묶어놓고 연간 800억 원도 채 되지 않는 예산을 지원해서는 국립대병원들을 살려내기 어렵다. 확실하게 자율성을 부여하고 깜짝 놀랄 정도로 국립대병원에 투자해야 한다. 그것이 필수의료, 지역의료를 살리는 첫 단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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