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가 낳은 위대한 러시아 작곡가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는 축구에 열광한 사람이었다. 그는 축구를 예술에 비유해 “대중의 발레”라고 했다. 그리고 그 발레를 평생 사랑했다. 축구 발레곡을 쓰기도 했고 신문에 글을 쓰기도 했다. 심판 자격도 있었고 선수들을 집에 초대해 식사하고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
그는 천재적인 작곡가였다. 일찍부터 인정과 존경을 받은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그는 국가적 영웅이었다. 그러나 그의 삶이 순탄한 것만은 아니었다. 모든 것을 통제하려고 했던 스탈린 때문이었다. 예술도 예외가 아니었다. 숱한 사람들이 사형과 유형에 처해진 것은 그래서였다. 그에게도 위기가 있었다. 그가 작곡한 오페라 ‘므첸스크의 맥베스 부인’을 스탈린이 보다가 중간에 떠난 적이 있었다. 그러자 공산당 기관지 ‘프라우다’지에 신랄한 기사가 실렸고 그는 “민중의 적”이 되었다. 그는 언제 경찰이 들이닥칠지 몰라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옷을 입은 채 잠을 잤다. 그리고 그러한 상황에서 쓴 교향곡 4번의 초연을 포기해야 했다.
또 다른 위기는 교향곡 8번이 반혁명적인 작품으로 매도당하고 스탈린으로부터 베토벤의 교향곡 9번 같은 숭고한 음악을 작곡하라는 요구를 받았을 때였다. 그런데 그의 교향곡 9번은 베토벤의 것과 달리 합창도 없고 독창자도 없었다. 지도자를 신격화하지도 않았다. 요구를 거부한 셈이었다. 스탈린은 분노했다. 중앙위원회에서는 그에게 반혁명적인 예술가라는 딱지를 붙였다. 그는 두려움과 극심한 스트레스 속에서 살았다. 그러한 삶은 스탈린이 죽을 때까지 계속되었다.
그의 숨통을 트이게 한 것은 축구였다. 그의 아들 막심 쇼스타코비치에 따르면 그는 교수직을 박탈당하고 음악원에서 쫓겨났을 때 축구로 관심을 돌림으로써 일시적이나마 긴장을 해소하고 안정을 찾았다. 일반 사진과 달리 축구장에서 찍은 사진들 속의 그가 그토록 해맑게 웃고 있는 이유다. “대중의 발레”가 예술의 장인을 구했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