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월가의 투자 보고서에 농업과 인플레이션을 합친 ‘애그플레이션’이라는 단어가 처음 등장한 건 2007년이다. 옥수수 값 폭등으로 멕시코에서 ‘토르티야 폭동’이 일어난 것을 시작으로 세계 30여 개 국가에서 식량 가격 급등으로 인한 폭동이 발생하던 때였다. 식량 위기가 안보 위기로 확산되자 반기문 당시 유엔 사무총장은 2008년 4월 비상사태를 선포했다.
식량 위기 공포에 다시 방아쇠를 당긴 것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이다. 세계 최대 곡물 생산·수출국으로 꼽히는 두 나라의 전쟁이 길어지면서 세계인의 식탁이 위협받고 있다. 여기에다 올해 극단적인 폭염·폭우 등 이상기후로 물가가 치솟는 ‘기후플레이션’까지 맞물려 식량 위기가 일시적 현상이 아니라 구조적으로 고착화될 것이라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한국도 안전지대가 아니다. 극한 기후는 이미 우리 밥상을 덮쳤고 쌀을 제외한 곡물 자급률은 바닥 수준이다. ‘소리 없는 쓰나미’라 불리는 식량 안보 위기에 대비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 노골화되는 러시아의 ‘식량 무기화’
유엔 식량농업기구(FAO)가 발표하는 세계 식량가격지수는 전쟁 발발 직후인 지난해 3월 역대 최고치(159.7)로 치솟았다. 러시아의 흑해 봉쇄로 세계 3대 곡창지대인 우크라이나의 곡물 수출이 막히면서 2007∼2008년의 식량 폭동이나 2011년 ‘아랍의 봄’ 때보다 상황이 더 나빠진 것이다.
이를 가까스로 잠재운 것은 유엔과 튀르키예의 중재로 체결된 ‘흑해곡물협정’이다. 이 협정에 따라 전쟁 와중에도 지난해 7월 이후 우크라이나산 밀·옥수수·보리 등 3280만 t이 흑해를 통해 45개국으로 수출됐다.
하지만 앞서 3차례 협정을 연장했던 러시아가 지난달 17일 협정 파기를 선언하더니 흑해에 접한 우크라이나 최대 항구도시 오데사의 곡물창고와 항만 시설을 연일 공습했다. 이어 24일에는 전쟁 이후 처음으로 다뉴브강 항구도시 레니를 공격했다. 흑해 항로를 대체할 수출길은 다뉴브강을 이용한 수로와 인접 국가를 거치는 육로뿐인데 노골적으로 내륙 수로 곡물 항구를 타격한 것이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의 곡물 수출을 인질로 삼아 전 세계를 대상으로 ‘식량 테러’를 가하고 있다는 비판이 쏟아지고 있다.
세계 곡물 시장은 즉각 반응했다. 지난달 25일 미국 시카고상품거래소에서 밀 선물 가격은 부셸(약 27kg)당 7.7달러에 거래되며 5개월 만에 최고치로 뛰었다. 곡물협정 중단 이후 나흘 새 18% 급등한 것이다. 일각에서는 현재 북반구가 곡물 수확기인 데다 세계 최대 밀 생산국인 러시아에 수출 가능한 물량이 쌓여 있어 국제 곡물 가격이 지난해처럼 계속 급등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하지만 사태가 장기화되면서 국제 곡물 가격이 요동칠 것이라는 관측이 높다. 러시아의 ‘곡물 만행’이 서방의 제재 완화를 노린 것이기 때문이다. 러시아는 전쟁 이후 퇴출당한 국제금융결제망(SWIFT·스위프트) 재가입 등을 요구하고 있는데 서방으로선 수용하기 쉽지 않다. 국제통화기금(IMF)은 이번 사태로 곡물 가격이 최대 15% 상승할 수 있다고 내다봤다.
● ‘기후플레이션’ 몰고 온 엘니뇨
지난해 말 현재 식량 수출의 빗장을 걸어 잠근 국가는 27개국에 이른다. 밀, 옥수수 같은 곡물뿐만 아니라 육류, 유제품, 팜유, 비료 등 57개 품목에 대해 수출 금지나 수출 물량 제한 등의 조치가 시행됐다.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식량 위기 우려가 높아지자 각국이 식량보호주의를 강화하고 나선 것이다.
이 같은 움직임이 자국의 식량 수급 안정에는 도움이 될지 몰라도 중장기적으로 국제 식량 가격을 더 높이는 역효과로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 한국은행이 밀 가격 변화를 실증 분석했더니, 수출 제한 비중이 1%포인트 늘 때마다 밀 가격은 2.2%포인트 올랐다.
더군다나 올해는 4년 만에 발생한 엘니뇨로 극한 폭염과 폭우, 가뭄 등 이상기후가 지구촌을 덮치면서 식량 가격 급등세와 식량 보호 움직임이 가속화되고 있다. 설탕(원당) 선물 가격은 사탕수수 최대 산지인 인도와 브라질의 가뭄으로 5월 파운드당 26센트를 넘어서며 12년 만에 최고치를 찍더니 현재 24센트를 오르내리고 있다. 초콜릿 원료인 카카오 원두 가격은 1·2위 생산국인 아프리카 코트디부아르와 가나의 폭우로 지난달 46년 만에 최고치를 경신했다.
중남미 파나마가 100년 만에 최악의 가뭄을 겪으면서 칠레산 와인, 브라질산 소고기, 에콰도르산 바나나 등의 수출도 차질을 빚고 있다. 글로벌 물류 요충지인 파나마운하의 수위가 낮아져 선박 통행을 제한한 탓이다.
인도는 올 들어 설탕 수출을 제한한 데 이어 지난달 20일부터 바스마티 품종을 제외한 모든 품종의 쌀 수출을 금지했다. 인도 쌀 수출 물량의 45%를 차지하는 규모다. 최근 인도 북부 지역이 45년 만에 최악의 홍수 피해를 입으면서 쌀값이 들썩이자 특단의 조치에 나선 것이다. 세계 최대 쌀 수출국인 인도의 금수 조치로 국제 쌀 가격도 뛰고 있다.
점점 뜨거워지고 있는 지구가 식품 물가를 끌어올리는 ‘히트플레이션’(열+인플레이션)이 본격화됐다는 평가도 나온다. 유럽중앙은행(ECB)이 5월 내놓은 보고서에 따르면 코로나19와 우크라이나 전쟁 요인을 제외하고 폭염 영향만으로 지난해 유럽 식품물가 상승률은 0.67%포인트 더 높아졌다. 독일 포츠담기후변화연구소는 이 보고서에서 “2035년에는 기후 변화가 세계 식품물가 상승률을 최대 3.23%포인트 끌어올릴 수 있다”고 지적했다.
● ‘자급 능력+해외 조달+비축’ 3박자 갖춰야
더 섬뜩한 건 우크라이나 전쟁은 여전히 교착 상태이고 극한 기후는 올해 시작에 불과하다는 점이다. 미국항공우주국(NASA·나사) 등은 엘니뇨 영향이 본격화하는 내년이 올해보다 더 더울 것이라는 관측을 잇달아 내놨다.
식량 위기가 상시적이고 구조적인 위험이 될 가능성이 높다는 뜻이다. 국내에서도 최근 극한 호우에 불볕더위가 이어지며 채소 값이 한 달 새 2∼4배 급등했는데 일시적 현상으로 볼 게 아니다.
게다가 한국은 국제 곡물 가격 급등과 식량보호주의 움직임에 매우 취약하다. 연간 수요량의 80%(1800만 t)를 해외에 의존하는 세계 7위 곡물 수입국인 탓이다. 1980년대 50%를 넘던 한국의 곡물 자급률(사료용 포함)은 2021년 20.9%까지 떨어졌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최하위다.
자급률이 85%에 육박하는 쌀을 제외하고 밀(1.1%), 옥수수(4.2%), 콩(23.7%) 등 나머지 주요 곡물은 대부분 수입한다. 세계 곡물 값이 뛰면 국내 가공식품과 외식 물가는 물론이고 생활 물가 전반이 줄줄이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글로벌 경제 패권 경쟁과 공급망 재편이 심화되는 가운데 식량과 자원을 무기화하는 국제적 흐름은 더욱 강화될 것으로 전망된다. 한국도 이에 대비한 종합적이고 체계적인 식량 안보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
곡물은 하루아침에 생산 기반을 늘리고 자급화를 실현하는 게 힘든 만큼 쌀 중심으로 돼 있는 식량비축 제도를 확대하고 안정적인 해외 공급망을 확보하는 게 중요하다. 일본은 밀과 사료곡물 등의 상시 비축을 법제화하고, 종합상사들이 일찌감치 해외 농업 개발과 계약재배 등에 뛰어들어 곡물 수입의 70%를 안정적으로 책임지고 있는데 이를 벤치마킹할 필요가 있다.
중장기적으로는 국내 자급 능력을 높이는 데 힘써야 한다. 임정빈 서울대 농경제사회학부 교수는 “자급률을 높이려면 우량 농지를 보존하는 것이 중요하다”며 “아울러 밀, 콩, 옥수수 등 자급률이 낮은 곡물에 대해선 쌀 농가 수준의 보조금을 지원하는 정책이 필요하다”고 했다.
신냉전 구도가 갈수록 뚜렷해지는 상황에서 지금의 ‘반도체 전쟁’이 언제 ‘식량 전쟁’으로 확대될지 모른다. 총성 없는 식량 전쟁에 대비해 정부와 민간이 머리를 맞대고 서둘러 대응책을 마련해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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