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교사의 죽음을 계기로 교사들이 쏟아내는 ‘괴물 학부모’ 경험담을 들으며 “학부모와 교사는 천적”이라는 말이 떠올랐다. 교육사회학의 고전인 ‘가르침의 사회학’(윌러드 월러)에 나오는 구절로 교사와 학부모는 원래 교육관이 달라 적대감으로 경쟁하는 관계라는 뜻이다.
옛날엔 교사를 어려워하는 학부모는 있어도 학부모 무서워하는 교사는 드물었다. 그런데 민주화 이후 학부모가 교육기본법상 자녀 교육의 권리와 책임을 지닌 당사자 지위에 오르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학부모의 참여를 독려하는 정책에 따라 교사가 독점하던 교육 권한을 나눠 갖게 되자 서로 다른 교육 철학으로 대립하는 사이가 된 것이다.
교육학자들에 따르면 교사는 과정 중심적이고 학부모는 결과 중심적이다. 학부모는 ‘내 아이’가 우선이고 교사는 ‘우리 반’이 중요하다. 학부모는 예외적 대우를 기대하지만 교사는 공평해야 한다. 학부모가 “나쁜 친구들과 어울리면 안 된다”며 짝꿍 교체를 요구하면 교사는 “모든 친구들과 잘 지내야 한다”며 설득해야 하는 존재다.
교육 정책은 학부모와 교사의 ‘수평적 파트너십’을 지향하지만 현실에선 서로 “내가 을”이라며 싸운다. 교육 수준에 권리의식까지 높아진 학부모들은 “선생 알기를 우습게 안다”는 것이 교사들 주장이다. “수업은 이렇게, 시험은 저렇게” 하고 학교 일에 간섭하면서 밤낮 주말 가리지 않고 문자 하고 전화하며 집에서 챙길 일까지 떠넘긴다는 것이다. 학부모들의 피해의식도 만만치 않다. 시험 감독, 바자회, 교통안전 지도 등 필요할 때는 ‘도우미’ 부르듯 하고는 ‘부르기 전엔 오지 말라’고 선을 긋는단다. “준비물을 넉넉히 챙겨 보냈더니 ‘한 개라고 하면 한 개만 보내라’는 알림장 답글을 받았다”며 학교의 권위주의 문화가 여전하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교사와 학부모 간 소통의 어려움도 불신을 키우는 요인이다. 학생의 사생활 보호를 이유로 집에 TV나 에어컨이 있는지까지 시시콜콜 묻던 가정환경 조사서와 일기 검사가 사라져 교사로서는 학생 사정을 짐작하기 어렵다. 김영란법으로 거리감은 더해졌다. 교사를 만날 기회가 없는 학부모들은 자녀가 자기 위주로 들려주는 말, 알림장의 요약된 언어, 맘카페의 ‘카더라’ 정보에 의지해 별일 아닌 일을 큰일로 오해하고 마는 것이다.
이렇게 껄끄러운 관계를 방치하다 다다른 곳이 전쟁터 같은 학교다. 교사는 악성 민원에 시달리다 보험 들고, 병가 내고, 일찍 명퇴한다. 학부모는 아이 가방에 녹음기를 넣어 보낸다. 교사의 자질과 능력을 ‘신뢰한다’는 학부모가 2001년 27.6%에서 2021년 21.8%로 하락했다. 미국의 경우 교사에 대한 신뢰도가 63%이고 일본은 학부모의 학교교육 만족도가 꾸준히 오르고 있는 것과 비교하면 뼈아픈 현실이다(한국교육개발원).
정부는 뒤늦게 교사들의 소송을 지원하고, 학부모 면담실에 감시카메라 달고, 민원처리 매뉴얼을 만들겠다고 한다. 이는 맨몸으로 당하던 교사들에게 방패를 쥐여줄 뿐 ‘천적’들의 전쟁을 막지는 못한다. 교사와 학부모가 오랫동안 불화해온 이유부터 살펴볼 필요가 있다. 자식 학교에 맡겨놓은 학부모들은 자문해 보자. 학부모의 교육 참여를 명분으로 공교육이야 어찌 되든 내 자녀 민원 처리에만 몰두해온 것 아닌가. 교사들도 분노를 가라앉히고 돌아봤으면 한다. 교권은 누구도 건드릴 수 없다는 신성주의에 빠져 개방과 자율이라는 시대 흐름을 외면하다 불신을 자초한 것은 아닐까. 왜 아이 교육이라는 공통된 목표를 가지고도 싸우는 적이 됐는지 반성하고 평화로운 협력자가 되는 길을 찾아내야 한다. 녹음기와 감시카메라 없이 교사와 학부모가 마주할 수 없다면 그 교육은 시작도 전에 실패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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