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라는 사람[내가 만난 名문장/김종욱]

  • 동아일보
  • 입력 2023년 8월 6일 23시 36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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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굉장한 적을 만났다. 아내다. 너 같은 적은 생전 처음이다.’
―영국 시인 조지 바이런


동명 창작 뮤지컬을 기반으로 한 소설 ‘김종욱 찾기’는 누구나 한 번쯤 겪었을 법한 첫사랑의 추억을 다루고 있다. 김종욱과 동명인 나는 십수 년 전 ‘김종욱과 동반 1인 뮤지컬 무료 관람’ 이벤트 덕택에 공연 관람 후 수십 명의 ‘김종욱’들과 무대 앞에서 기념 촬영을 한 경험이 있다. 당시 쑥스럽다며 무대로 나오지 않고 객석을 지켰던 여자친구는, 지금 내 반려자가 되어 세 남매 엄마로서 씩씩한 삶을 살고 있다.

김종욱 제우스투자일임사 대표
김종욱 제우스투자일임사 대표
위 바이런의 명언은 소설의 로맨틱한 분위기와는 사뭇 다르다. ‘굉장한 적’에 맞서기 위한 남편들의 노력은 얼마나 가상하던가. 함께 쇼핑 나온 아내가 거울 앞에서 보라색과 분홍색 옷을 들고 “여보, 나 어떤 색이 어울려?” 물어보면 무심한 남편들은 “둘 다 괜찮아”라고 말한다. 하지만 이는 아내들이 원하는 답이 아니다.

소통 강사로 유명한 김창옥 교수는 이렇게 말했다. “보라색은 어려 보이고, 분홍색은 날씬해 보이네!”라고 답해야 한다고.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고단함을 피하는 동시에, ‘적’의 추가 공세를 차단하는 기막힌 처세술에 남편들은 열광했다. 나 역시 ‘보라색은 어려 보이고…’를 틈틈이 외우고 있다. 아내가 물어보면 구구단처럼 튀어나올 수 있도록.

지루했던 장마가 끝나고 뙤약볕이 한참이던 어느 날, 점심 먹고 사무실로 들어가는 내 앞에 한 노년 부부가 걸어가고 있었다. 무심코 지나치려던 내 시선에 들어온 할머니의 앙증맞은 꽃무늬 양산과 두 분의 승강이. ‘나는 괜찮다’는 할아버지를, 할머니가 타박하며 작은 양산 아래로 끌어당기고 있었다. 도망가려는 할아버지 옷깃을 꽉 붙잡고 양산을 씌우느라 할머니 머리 위로 따가운 햇볕이 내리쬐지만, 정작 당신은 아랑곳하지 않는다. 잠시 후 할아버지는 체념한 듯 슬며시 꽃무늬 양산 아래로 들어오더니 할머니와 나란히 걷는다. 참으로 굉장한 적이 아닐 수 없다.

#조지 바이런#김종욱 찾기#아내라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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