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강남구 압구정동에 사는 50대 지인은 최근 사석에서 이렇게 말했다. 처음엔 무슨 말인가 싶었는데 듣다 보니 부동산 얘기였다. 재건축을 추진 중인 압구정동 아파트들이 서울 송파구에 위치한 이른바 엘리트(잠실엘스, 리센츠, 트리지움) 단지들을 벤치마킹해야 한다는 것이다.
사연은 이랬다. 대개 정부와 지자체는 아파트 재건축을 허가하면서 단지들이 얼마나 공공에 기여하는지를 따진다. 예컨대 임대주택을 더 많이 적극적으로 수용할수록 용적률을 높여주는 식이다. 반면 엘리트 단지들은 재건축 과정에서 이 같은 압박을 뚫고 ‘임대주택 없는 단지’를 관철시켰다. 이 지인은 “오세훈 서울시장이 엘리트의 길을 가로막고 있는데, 이명박 전 대통령의 시장 시절이었다면 반대였을 것”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서울시는 재건축 시장의 최대어로 손꼽히는 ‘압구정 3구역’과 갈등을 빚고 있다. 인허가권자인 서울시가 용적률, 임대주택 구성 방식 등을 문제 삼아 설계업체를 경찰에 고발까지 한 상황이다.
서울시는 오세훈표 신통(신속+통합)기획의 소셜믹스(Social Mix) 취지를 압구정 3구역 조합이 훼손시켰다고 보고 있다. 설계에서 임대주택과 일반 분양분을 조합원과 분리한 점이 대표적이다. 사회적 경제적 수준이 다른 주민들이 함께 어울려 살면서 계층 격차가 심화되는 것을 방지하려는 소셜믹스의 정책 취지를 조합이 부정했다는 것이다. 공공보행로를 단지 바깥쪽으로 우회시켜 단지 내 일반인 통행을 제한한 것도 문제라고 보고 있다. 부자 동네와 일반 동네를 노골적으로 가르려는 조합의 이기심이 반영된 설계라는 것이다. 서울시 관계자는 “압구정이 뚫리면 서울 전체가 뚫리는 것 아닌가”라며 “신통기획을 통해 재건축 기간을 대폭 줄이는 대신 조합도 공공에 뭔가는 기여해야 한다”고 말했다.
오 시장의 이 같은 행보는 여당 안팎에서도 주목하는 인사들이 적지 않다. ‘보수는 부동산 규제 완화에 몰두하고, 진보는 규제에 집착한다’는 이분법적 인식을 깨는 것이기 때문이다. 오 시장이 진보성향 단체로 분류되는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경실련) 출신 김헌동 서울주택도시공사(SH공사) 사장을 기용한 것도 맥을 같이한다. 여당 관계자는 “박원순 전 시장 시절에도 소셜믹스는 초소형 평형에서만 실현돼 한계가 있었는데, 오 시장이 이보다 개혁적인 주택 정책을 추진하는 점이 인상적”이라고 말했다.
물론 아파트 단지에서 함께 섞여 산다는 것 자체만으로 계층 통합이 이뤄지는 것은 아니다. 조합원과 임대주택이 혼합된 아파트 단지에서 거주민들이 받는 심리적 차별과 스트레스가 만만치 않다는 연구도 적지 않다. 대표 부촌인 압구정동에서 오 시장의 소셜믹스 실험이 성공하려면 물리적 결합을 넘어설 수 있는 디테일한 정책들이 뒷받침돼야 한다. ‘임대주택도 타워팰리스처럼 만들겠다’는 오 시장의 구상이 압구정동을 넘어 더 많은 시민들에게 공감받는 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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