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쳐 쓰는 삶[2030세상/박찬용]

  • 동아일보
  • 입력 2023년 8월 7일 23시 30분


박찬용 ‘아레나 옴므 플러스’ 피처 디렉터
박찬용 ‘아레나 옴므 플러스’ 피처 디렉터
“배터리 바꾸셔야 해요. 거의 끝났어요.” 자동차보험 긴급출동 서비스 사장님이 말했다. 한숨이 나왔다. 저번에도 방전되어 교체했는데. 나는 유럽의 대성당처럼 천천히 고치는 26년 된 가솔린 수동변속기 차를 갖고 있다. 차 상태가 정상이 아니라 운전 빈도가 낮고, 운전 빈도가 낮아 금방 방전된다. 고치려면 공이 드는데 지금은 시간을 들여 부품을 찾을 여력을 낼 수가 없다. 그 결과 나는 어느 여름날 방전된 차 앞에서 땀을 뻘뻘 흘리며 배터리 사망 선고를 한 번 더 듣게 되었다.

겨우 충전을 마친 그 차를 타고 보관창고로 향했다. 손목시계를 고치기 위해서였다. 나는 시계도 오래된 걸 쓴다. 원활한 수리를 위해서는 보증서가 있는 게 좋다. 보증서는 외부 보관창고에 있다. 창고에 도착하니 짐이 꽉 차 있어 보증서를 찾을 수가 없었다. 어지러운 창고를 보며 며칠 전 아버지와 나눈 이야기가 생각났다. 본인께서 몰고 있는, 내 다른 차의 고장에 대한 불만이었다. 외국에서 주문한 수리 부속이 거의 다 왔다고 말씀드렸다. 여기도 고장, 저기도 고장이었다.

다 내가 자초한 일이다. 내가 오래된 물건들을 끼고 살다 생긴 일이다. 창고에 짐을 둔 이유는 오래된 집을 수리하다가 적절한 이사 시기를 잘 맞추지 못해서였다. 나는 몇 가지 이유로 전문 인테리어 디자이너를 모시지 않고 집을 고치기로 했고, 그 결과 인테리어의 모든 부분에서 시행착오를 겪고 있었다. 창고에 넣어둔 짐을 못 빼는 건 내 시행착오의 아주 작은 일부에 불과했다.

라이프스타일 잡지 에디터, 그러니까 갓 출시된 요란하고 그럴싸한 물건을 소개하는 일을 하며 나는 새로 나온 것들에 점점 무감해졌다. 이제 소비재의 발전상은 기계에서 전자로, 하드웨어에서 소프트웨어로, 기술 자체보다 마케팅으로 넘어갔다. 이런 고도 자본주의의 변환기를 거치며 나는 새로 나온 게 아니라 시간의 흐름을 견디고 살아남은 것을 오히려 좋아하게 되었다. 차든 집이든 시계든 모든 물건은 사람의 몸처럼 쓰다 보면 고장이 난다. 나는 내가 좋아하는 물건들을 택한 대가를 치르는 중이다.

오래된 물건 사이에 둘러싸여 깨달은 게 많다. 세상에 고치지 못할 물건은 없다. 어떻게든 수리 방법이 있고, 정보화 혁명 덕분에 물건 수리 관련 정보는 인류 역사상 최고로 풍성해졌다. 서울에 살면서 단종된 독일차의 부속을 배송비 무료로 주문하는 게 가능하다. 다만 물건과 기계에도 수명과 생명이 있어서, 사람이나 동물이나 물건이나 공을 들이면 오래 건강하고 공을 안 들이면 금방 고장 나거나 망가진다. 나는 반려동물이나 반려식물이 필요 없다. 반려 노후 제품이 이미 너무 많다.

고쳐 쓰는 삶에서 배운다. 온갖 자동차 부품과 소모품의 품질 기준과 수급 방법, 오래된 시계를 고치는 몇 가지 방법론과 각자의 장단점, 꽉 찬 보관창고에서 물건을 빼내는 노하우. 이 모든 경험을 나는 좋아한다. 내가 세상을 바꾸진 못해도 내 앞의 문제들을 하나씩은 바꾼다는 실감을 느끼기 때문이다. 요즘 내 세대에는 돈을 벌어 여유를 사도 공허를 호소하는 사람들이 종종 있다. 나는 돈도 여유도 없지만 공허하진 않다. 고칠 게 많아서. 공허에는 답이 없지만 수리에는 답이 있다.

#고쳐 쓰는 삶#내 앞의 문제#2030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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