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의 공립고등학교 교사 헨리는 단기간 계약직으로만 일한다. 한 달간 그의 눈앞에 펼쳐진 풍경은, 품행 불량으로 퇴학시킨 교사의 얼굴에 침을 뱉으며 협박하는 여학생의 폭력과, 저런 딸을 이제는 내가 집에서 종일 돌봐야 하냐며 교사를 고소하겠다는 엄마의 난동과, 아들이 다른 학생에게 폭력을 일삼는 건 교사가 잘 돌보지 않은 탓이라고 비난하는 부모의 궤변과, 속살이 훤히 드러난 옷차림을 지적하는 교사에게 내가 뭘 입든 내 자유라고 맞받아치는 여학생의 무례함이다. 학부모가 된 적이 없는 나로서는 남의 나라 일이라고만 여겼다.
6년 전, 시골의 작은 초등학교에 간 적이 있다. 어린 여학생들이 화장을 진하게 해서 충격이었다. 하지만 교사들은 학생인권조례에 반하는 일이라 나무랄 수 없다고 했다. 어린 피부가 상하진 않을까, 혹시라도 성적 범죄의 대상이 되면 어쩌나 하는 걱정을 교사들이라고 안 할까? 부모 된 심정으로 한마디 해도 인권 침해에 해당되는 현실이다. 권리에는 그만큼의 책임과 의무가 따른다. 학생인권조례에는 교사에게 예의 있게 행동할 것이라든지, 다른 학생들의 수업권을 방해하지 않을 것, 어길 시에는 엄중한 벌을 받을 것 같은 가장 기본적인 조례가 빠져 있다. 우리나라가 참고했다는 뉴욕의 원본에는 비중 있게 명시되어 있지만 동방예의지국에서는 너무 당연해서 쓸 필요가 없었던 걸까? 하지만 이 점을 악용하는 학생과 부모는 학생과 교사의 인권이 반비례한다고 착각한다.
모든 법은 양면성을 지니지만, 상식적인 사람이라면 학생의 인권을 존중하는 조례를 교사의 인권을 짓밟는 일에 쓰지 않는다. 잘못을 상대방에게서만 찾는 사람들, 잘못이 발견되지 않으면 그제라도 자신의 과오를 살펴봐야 하는데 오히려 상대에게 책임을 떠넘기고자 사실까지 왜곡하는 부류는 어쩌면 자신의 열등감과 피해의식을 손발이 묶인 교사들에게 쏟아내는 건 아닐까? 하지만 사교육 현장에서는 학생의 인권보다 점수가 우대받는다. 교사가 했으면 난리 났을 일도 시험점수를 올려주는 강사에겐 문제 삼지 않는다.
영화 속 헨리는 학생들을 바른길로 이끌고 싶어 교사가 되었지만, 관심과 애정을 쏟을 수 없는 현실과 타협해 학생들과 인간적인 정을 맺기 힘든 단기간 교사 일만 한다. 영화 제목 ‘디태치먼트’의 뜻은 거리 두기, 무관심이다. 빗나가는 학생들을 눈앞에 두고서도 속수무책으로 거리 두기를 할 수밖에 없는 교사들은 마음에 병이 든다. 학생들에게 무관심한 교사라면 스트레스를 안 받겠지만 그만큼 다른 학생들이 피해를 본다. 이 자리를 빌려, 일곱 살 코흘리개 시절부터 건방 떨던 고3 때까지 저의 담임선생님이셨던 열두 분께 머리 숙여 감사드립니다. 꾸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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