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29일 중국 베이징에서 고속열차로 4시간 떨어져 있는 랴오닝성 다롄을 찾았다. 다롄에 있는 한 교민의 제보를 받고서다. 그는 “최근 다롄에서 항일정신 계승 활동이 위축되고 있다”고 말했다. 분명하지는 않지만 중국 당국의 개입으로 보이는 정황도 있다고 덧붙였다. 한중 관계가 안 좋아지면서 항일정신 계승마저 흔들리고 있다는 얘기다. 그 우려가 조금씩 현실이 되고 있다.》
다롄은 한국인에게는 ‘요동반도’로 더 익숙한 랴오둥(遼東)반도 끝에 있다. 인구 608만 명(2022년 기준)으로 랴오닝성 성도인 선양(인구 914만 명)에 이어 두 번째로 큰 도시다. 지리적으로 한반도와 가까워서인지 다롄에는 한국 교민도 많이 살고 있다. 최근 2000∼3000명 수준으로 많이 줄었지만 한때 4만 명에 달했던 적도 있다. 그래서 이곳에는 한국 국제학교가 있고 주중 한국대사관의 영사출장소도 있다.
대도시인 베이징 상하이 못지않게 여러 교민단체들도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2020년 SK하이닉스가 이곳에 반도체 공장까지 마련하면서 한국과는 더 가까워진 느낌이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다롄과 한국은 ‘안중근’이라는 역사적 인물로 연결돼 있다는 점을 빼놓을 수 없다. 다롄에는 안중근 의사가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뤼순(旅順)감옥이 있다.
폐쇄된 ‘안중근 전시실’
뤼순감옥의 현재 정식 이름은 한국식 한자 발음으로 ‘여순일아감옥구지(旅順日俄監獄舊址)’다. 러시아와 일본이 감옥으로 사용한 옛터라는 뜻이다. 중국 정부는 현재 감옥 부지 전체를 박물관으로 바꿔 운영하고 있다.
일본은 러일전쟁(1904∼1905년) 후 다롄을 점령하면서 더 많은 항일 운동가들을 수감하기 위해 뤼순감옥을 증축했다. 1906∼1936년 수감자는 11개국 항일운동가 2만여 명에 달했다. 한국인, 중국인, 러시아인 등이 수감됐는데 한국인으로는 안중근 신채호 이회영 등이 대표적이다.
2009년 당시 국가보훈처(현 국가보훈부), 광복회 등은 뤼순감옥 측과의 오랜 협의 끝에 중국 당국의 허가를 받아 한국 독립운동가들을 기리는 별도 전시관을 만들었다. 이곳에는 안 의사 흉상과 옥중 글씨 등이 전시돼 있어 ‘안중근 전시실’로 불리며 다롄을 방문하는 한국인 관람객들의 필수 코스가 됐다.
중국 당국도 이 사실을 알고 많은 배려를 해 왔다. ‘안중근 전시실’ 외에도 뤼순감옥 박물관 내 모든 전시실에 중국어와 함께 한국어가 병기돼 있을 정도다. 일제 침략을 함께 겪은 한국과 중국이 항일정신 계승만큼은 함께할 수 있다는 의지를 보인 것으로 해석된다.
하지만 한중 항일정신 계승 공동 활동의 산물로 여겨져 온 ‘안중근 전시실’은 최소 2개월 이상 폐쇄 상태가 지속되고 있다. 기자가 지난달 29, 30일 이틀간 방문한 ‘안중근 전시실’은 입구에 자물쇠가 채워진 상태였다. 뤼순감옥 박물관 내 다른 전시실은 모두 관람이 가능한데 유독 ‘안중근 전시실’만 관람이 불가능한 것이다.
뤼순감옥 박물관 관계자는 지난달 30일 안중근 전시실 폐쇄 사유와 재개관 일정 등을 묻는 동아일보의 질문에 “시설 점검 및 보수 중”이라며 “재개관 날짜는 모른다”고 답했다.
8일 중국 관영 글로벌타임스는 “‘안중근 전시실’은 누수 문제로 보수를 위해 문을 닫은 것”이라며 “어느 박물관에서나 통상적으로 하는 수리를 의도적으로 양국 관계로 연결해 중국에 대한 분노를 유발하려는 사람들이 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전시실이 폐쇄된 지 이미 최소 2개월 이상 지났고, 이틀 동안 폐쇄된 전시실을 지켜본 결과 아무런 보수 활동이 없었다는 점은 중국 측의 설명을 무색하게 하고 있다. 또 전시실 폐쇄 시점으로 추정되는 4월은 윤석열 대통령이 로이터통신과의 인터뷰에서 “대만해협에서의 일방적 현상 변경을 반대한다”고 언급하면서 한중 갈등이 최고조에 이른 시기라는 점도 눈여겨볼 대목이다. 단순히 ‘내부 수리’를 위한 폐쇄가 아닐 수 있다는 얘기다.
‘항일정신 계승 활동’ 위축
중국 당국이 밝힌 대로 ‘안중근 전시실’을 실제 수리하려는 계획이라고 해도 다롄 지역 전반에서 한국인들의 항일정신 계승 활동이 위축되고 있는 점은 분명한 사실이다. 특히 지난해와 달리 올해 모든 관련 활동이 연기되고 있다.
다롄에 있는 교민단체인 ‘안중근 의사 정신찾기 운동본부’는 지난해 5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상황 속에서도 안 의사의 항일정신과 애국정신을 되새기는 걷기 대회를 개최했다. 이 행사에는 교민 300여 명이 참가했다. 지난해 7월에는 동북3성(랴오닝성, 지린성, 헤이룽장성)에 있는 한국 학생 30여 명을 선발해 ‘안중근 의사 정신 계승 리더십 함양 캠프’ 행사도 개최했다. 또 11월에는 다롄에 있는 한국 국제학교 교사와 학생 170여 명이 참여해 안 의사에 대한 재판을 연극을 통해 재해석하는 행사도 열었다. 과거 일제가 사형선고를 내린 재판이 부당하다는 점을 알리는 자리였다.
운동본부 관계자는 “지난해의 경우 이 행사들을 개최할 때 중국 측 관계자들의 전폭적인 지지가 있었다”면서 “올해도 5월과 7월에 행사를 개최하기 위해 날짜까지 확정했지만 중국 측 분위기가 확연하게 달라져 행사를 개최할 수 없었다”고 말했다. 중국에서 외국인들이 행사를 개최하기 위해서는 중국 공안 당국의 협조가 반드시 필요한데 이것이 전혀 이뤄지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결국 지난해 코로나19 속에서도 성황리에 개최됐던 행사들이 올해는 줄줄이 연기됐다. 하반기에 개최할지도 불투명한 상황이다.
뤼순감옥 주변에서 오랫동안 진행돼 온 안 의사 유해 찾기 움직임도 지지부진해진 모습이다. 올 5월 안 의사의 유해가 묻혀 있을 가능성이 높은 곳이 제시됐지만 중국 당국의 협조 없이는 발굴이 불가능하다.
한중 관계가 항일 과거사 조명 작업에 영향을 미치는 사례는 다롄에 국한되지 않는다. 지린성 옌볜조선족자치주 룽징(龍井)에 있는 윤동주 시인 생가도 7월부터 폐쇄됐다. 윤동주 생가는 인근 백두산을 찾는 한국인 관광객들의 필수 관람 코스다.
중국 측은 윤동주 생가 역시 내부 수리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4일 윤동주 시인 생가 관리자는 동아일보와의 통화에서 “옌볜조선족자치주 정부의 요구로 폐쇄 중”이라고 밝혔다. 내부 수리를 위해서가 아니라 지방정부의 요구가 있었다는 얘기다.
한중 양국이 이견 없이 공동으로 진행할 수 있는 항일정신 계승 활동에 대해서도 중국 측이 딴죽을 걸고 나오면서 한중 관계가 더 악화돼선 안 된다는 우려가 확산하고 있다.
다만 일부에서는 중국에 고도의 정치적 노림수가 있는 것 아니냐는 분석도 나온다. ‘안중근 전시실’과 ‘윤동주 생가’ 폐쇄가 윤석열 정부의 반중(反中) 움직임 탓이라는 여론을 조성해 한국 정부를 압박하려 한다는 얘기다. 중국공산당이 중요 국면 때마다 여론몰이에 능한 면모를 보여 왔던 점을 고려하면 개연성이 있는 해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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