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컷 먹고 떠나니 앵두처럼 무겁구나. 굶주리고 올 땐 버들솜처럼 가볍더니. 먹은 뒤엔 이곳을 벗어나기 바빠서, 제 앞길은 전혀 따지지 않는구나. (飽去櫻桃重, 飢來柳絮輕. 但知離此去, 不用問前程.)
―‘모기에 대하여(영문·詠蚊)’ 범중엄(范仲淹·989∼1052)
버들솜처럼 가볍게 왔다가 앵두처럼 무거운 몸으로 떠나는 것, 제 앞길 따지지 않고 서둘러 그 자리를 떠나려고만 하는 존재, 시인은 재바르게 치고 빠지는 모기의 속성을 이렇게 묘사했다. 피를 포식했으니 앵두빛 짙붉은 몸뚱어리가 쉬 눈에 띄기도 하고 날갯짓도 둔중해질 건 뻔하니 그만큼 생존의 위험성도 가중될 터다. 앞뒤 가릴 것 없이 ‘범죄 현장’을 떠나려는 건 녀석으로선 당연한 선택이다. 시인이 보기에 녀석이 자기 잇속만을 챙기는 탐욕의 화신일지라도 굳이 그 미물을 책망할 이유는 없겠다. 앞날에 도사린 위기를 외면한 채 무분별하게 탐욕에만 매몰된 인간 군상을 경계하고 싶었을 것이다.
기어이 피를 보고서야 마무리되는 인생 최초의 혈투는 모기와의 오랜 악연이다. 한밤중 무시로 잠에서 깨어나 녀석과 겨루었던 약 오르는 추억이 아련하다. 모깃불을 피워 쫓아내기만 하던 인도주의적인 방식부터, 향긋함을 위장한 독 연기로 저도 모르게 목숨을 앗아버리는 은밀한 도살법, 그리고 쫓고 쫓기는 고도의 신경전을 벌이다 ‘찰싹!’, 기어코 녀석의 피를 확인하고야 마는 통쾌한 보복전까지 녀석과 벌여온 쟁투 과정은 다양하다. 옛사람들의 경험담이라고 다를 바 없다. 당 유우석(劉禹錫)은 ‘난 7척 거구, 넌 가시만큼 작은 존재. 하지만 난 혼자요 너희는 다수이니, 나를 다치게 할 수 있지’(‘모기떼 이야기’)라 했고, 다산(茶山)은 ‘제 뺨을 제가 때리지만 헛방 치기 일쑤요, 넓적다리 다급히 치지만 녀석은 이미 떠나버렸네. 싸워봐야 공은 없고 잠조차 설치기에, 지루한 여름밤이 일 년처럼 길구나’(‘가증스러운 모기’)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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