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광암 칼럼]‘주먹구구-열정페이’식 軍 대민지원, 과연 필요한가

  • 동아일보
  • 입력 2023년 8월 14일 00시 0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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軍 대민 지원 동원 매년 연인원 83만
청춘 갉아먹는 ‘노력 동원’은 사라져야
재난 대응엔 앞으로도 할 일 많지만
훈련·안전대책 없인 안 하느니만 못해

천광암 논설주간
천광암 논설주간
고 채수근 해병 순직 사고 조사 결과를 놓고 국방부와 해병대 수사단장을 맡았던 박정훈 대령 간에 진실 공방이 뜨겁다. 박 대령은 국방부가 해병대 1사단장의 형사책임을 축소하기 위해 외압을 넣었다고 주장한다. 반면 국방부는 박 대령이 부당한 외압이 아니라 상부의 정당한 지시를 어긴 항명 사건이라고 맞서고 있다.

절차적 논란까지 덧붙여지면서 형사책임에 대한 최종 결론이 나기까지 적지 않은 시간이 걸릴 것으로 보인다. 채수근 해병과 유족의 원통함을 달래주기 위해서는 시간이 얼마나 걸리든 형사책임을 철저하게 규명해 응분의 조치를 해야 한다.

하지만 형사책임 규명이 전부는 아니다. 비슷한 일이 되풀이되지 않도록 하려면 제도나 관행 등에 문제가 없었는지도 철저히 따져 봐야 한다. 이제는 군의 대민(對民) 지원이 과연 필요한지, 필요하다면 어디까지가 적정한 수준인지에 대해서도 근본적인 질문을 던져 볼 때가 됐다.

한국군이 2020년부터 3년간 대민 지원에 투입한 병력은 평균 83만여 명(연인원 기준)에 이른다. 그 범위도 태풍·호우·폭설 같은 자연재해 대응과 피해 복구 작업, 코로나19 대응, 가축전염병 대응, 농촌 일손 돕기 등으로 다양한 분야에 걸쳐 있다.

이 중 대규모 재난은 기후변화 등으로 예측이 점점 어려워지고 그 규모나 범위도 커지는 현실을 고려할 때 군의 역할을 확대할 필요가 있다. 국제적인 흐름에도 맞다. 미군도 인도적 지원과 재난구조(HA/DR)를 중요한 임무의 하나로 삼고 있다. 대형 지진 등 자연재해가 많은 일본에서는 자위대가 지자체·경찰·소방보다 더 큰 역할을 할 때가 많다.

자위대의 경우 동일본대지진 당시 독자적으로 또는 지자체·경찰·소방과 연계해서 1만9286명을 구출했다. 전체 생존 구출자의 약 70%에 해당하는 수치다. 재해 발생에 앞서 지자체·경찰·소방은 물론 해당 지역 주민까지 포함해 ‘실전’과 같은 대규모 훈련을 거듭해 온 결과였다.

한국 해병대의 ‘주먹구구식’ 대응은 이와 극명하게 차이 난다. 해병대는 해상 훈련을 전혀 받지 않은 포병을 수변 수색 작업에 투입했고, 주요 임무가 수색 작업이라는 사실을 현장 지휘관에게 뒤늦게 전달해 구명조끼나 로프 같은 기본 안전장비도 갖추지 못했다. 이래서는 군이 재난 대응에 오히려 ‘짐’이 될 뿐이다.

한국군이 재해 대응에 더 적극적인 역할을 하도록 하려면 허점투성이인 관련 법규와 매뉴얼을 대대적으로 정비하고 체계적이고 반복적인 재난 대응 훈련 경험을 쌓아야 한다. 훈련되지 않은 병력을 현장에 투입해 2차 재난을 자초하는 일이 절대로 있어선 안 된다.

군 본연의 임무와 무관한 ‘노력 동원’식의 대민 지원은 과감히 정리해야 한다. 이와 관련해서는 이미 오래전부터 시대착오적이라는 비판과 지적이 적지 않았다. 이명박 정부 시절에는 4대강 사업 비용 절감을 위해 청강부대를 창설해 운영하다가 군을 정권의 사병(私兵)쯤으로 여긴다는 지적을 받았다. 문재인 정부 시절에는 평창 올림픽 쇼트트랙 빙상장을 교체하는 작업에 군 장병을 동원했다가 여론의 뭇매를 맞았다.

연례행사인 농촌 일손 돕기에 대해서도 ‘열정페이’ 논란이 끊이지 않는다. 당초 농촌 일손 돕기는 베트남전쟁이 한창이던 1960년대에 파병 장병의 가족을 돕는다는 차원에서 제한적으로 시작됐다. 농가 인구가 전체 인구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던 시절이었기에 대부분 ‘농민의 자식’인 군인들이 모심기와 추수를 거드는 일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질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농가 인구의 비중이 4%대에 불과하고 특히 농촌은 저출산 현상이 더 심각하다. 요즘 젊은 군인들에게 농사일은 한 번도 경험해 본 적이 없는, 낯설고 고된 일일 뿐이다.

해병대 수사단이 밝힌 채수근 해병 사망 관련 수사기록에 따르면 현장 지휘관들이 안전을 담보할 수 없는 무리한 수색 작업을 한 것은 병사들의 안전보다 해병대의 홍보에만 연연한 1사단장의 행태에 압박감을 느꼈기 때문이라고 한다. 2020년 국감에서는 장병들을 대민 지원에 보내 놓고 장성급을 포함한 간부들은 근처에서 골프를 친 사실이 밝혀져 파문이 일기도 했다. 대민 지원이 ‘공짜 노동력’을 활용한 장교들의 실적 쌓기로 변질돼 가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 주는 대목들이다.

청년들 사이에서 “소중한 청춘을 군 간부들의 출세를 위해 잡일하는 데 낭비했다”는 말이 나오는 일이 없도록 대민 지원 전반을 원점에서 다시 봐야 한다.

#軍 대민지원#해병 순직 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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