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일(현지 시간) 미국 메릴랜드주 볼티모어를 찾았다. 존스홉킨스대 볼티모어 캠퍼스 앞 찰스스트리트 양옆으로 화려한 무지개색 깃발로 장식된 집들이 늘어서 있었다. 성소수자들이 자신의 정체성을 긍정하고 서로서로 연대하자는 뜻에서 내건 상징이다. 이 중 한 집에는 ‘증오가 머물 곳은 없다(Hatred has no home here)’는 문구가 담긴 팻말이 세워져 있었다.
찰스스트리트는 매년 6월 볼티모어에서 열리는 성소수자 축제 ‘프라이드 퍼레이드’의 주요 경로이자 대표적인 성소수자 밀집 지역이다. 팻말 속 문구와 달리 이곳은 그동안 여러 차례 혐오 범죄의 타깃이 됐다. 지난해에는 한 깃발에 불이 붙으면서 최소 4채의 집이 불타고 주민들이 병원에 실려가는 사건이 발생했다. 볼티모어 경찰은 이 사건을 방화로 인한 혐오 범죄로 보고 수사를 벌이고 있지만 아직 범인을 붙잡지 못했다.
올 4월에는 대낮에 무차별 총격 사건이 발생해 4명이 총상을 입었다. 두 달 후에는 프라이드 깃발을 내건 인근 교회들을 골라 깃발과 게시판 등을 연쇄 훼손하는 일도 벌어졌다. 찰스스트리트에 사는 주민 레일라 씨는 “언제든 무차별 범죄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불안이 있다”고 토로했다.》
최근 미국에서는 혐오 범죄가 크게 증가하고 있다. 특히 중요한 선거가 있는 해마다 혐오 범죄가 급증했던 과거 사례를 감안할 때 내년 11월 대선을 앞둔 올해와 내년 또한 혐오 범죄가 급증할 위험이 상당하다는 우려가 나온다.
특히 야당 공화당의 주요 대선주자들은 낙태, 동성혼, 성소수자, 총기, 인종차별 역사교육 등 보수와 진보가 첨예하게 대립하는 ‘문화 전쟁(culture war)’ 의제에서 ‘보수 전사(戰士)’를 자처하고 있다. 이에 따라 사회 분열이 심해지고 혐오 범죄 또한 늘어날 소지가 크다는 지적이 나온다. 정치적 양극화가 심해질수록 다른 인종, 성소수자 등을 겨냥한 무차별 범죄가 늘어날 수 있다는 우려다.
혐오 범죄 역대 최다
미 연방수사국(FBI)의 올 3월 발표에 따르면 2021년 미 전역에서 확인된 혐오 범죄는 1만840건으로 집계됐다. 2020년보다 12% 늘어난 역대 최다 건수다. 인종, 종교, 성 등 모든 분야에서 고르게 범죄가 늘었다.
특히 주요 대도시에서의 증가세가 두드러진다. 최대 도시 뉴욕에서는 지난해 619건의 혐오 범죄가 발생해 2021년보다 18% 늘었다. 1992년 이후 20년 만의 최고 증가율이다. 2대 도시 로스앤젤레스 역시 같은 기간 13% 늘어난 643건이었다. 시카고, 휴스턴, 필라델피아 등 다른 대도시에서도 지난해 역대 가장 많은 혐오 범죄가 발생한 것으로 나타났다. 12일에도 북부 미네소타주 최대 도시 미니애폴리스에서 열린 성소수자 파티에서 무차별 총격이 벌어져 1명이 죽고 6명이 다쳤다.
지난달 29일에는 뉴욕 브루클린의 한 주유소에서 흑인 남성 댄서 오셰어 시블리가 10대 남학생의 흉기에 의해 숨졌다. 시블리는 비백인계 성소수자 남성들이 주축인 댄스 커뮤니티에서 활동해왔다. 그는 주유 중 흑인 여성 가수 비욘세의 음악에 맞춰 춤을 추다가 무슬림이 포함된 10대 청소년 무리와 시비가 붙었고 이 중 한 학생이 휘두른 흉기에 가슴을 찔렸다.
당시 이 청소년들은 시블리에게 “우리는 무슬림이다. (게이) 댄스를 당장 멈추라”고 소리를 질렀다. CBS뉴욕에 따르면 무슬림인 10대 용의자는 시블리에게 동성애 혐오 및 인종차별적 발언도 했다.
시블리의 사망에 흑인 사회가 분노했다. 또 흑인 및 성소수자와 무슬림이 서로에 대해 보복에 나설 우려 또한 커졌다. 뉴욕경찰(NYPD) 출신인 에릭 애덤스 뉴욕시장은 직접 기자회견에 나서 “무슬림과 성소수자들은 모두 혐오 범죄의 희생자”라며 보복 자제를 당부했다. 미성년자여서 가해 학생의 신원은 공개할 수 없지만 그를 혐오 범죄로 기소하겠다며 흑인 사회를 달랬다. 이후 필라델피아, 로스앤젤레스 등에서도 시블리 추모 시위가 일어나는 등 혐오 범죄 대응을 촉구하는 목소리가 확산됐다.
아시아계-유대계도 대상
아시아계, 유대계를 향한 혐오 범죄도 계속되고 있다. 3일에는 뉴욕을 관광 중이던 한국계 미국인 여성 등 일가족이 지하철에서 흑인 10대 3명에게 둘러싸여 폭언과 폭행을 당했다. 지난달에는 서부 오리건주에서 일본 외교관이 노숙자로부터 공격을 받았다. 이 노숙자는 그동안 수차례 아시아계를 상대로 비슷한 범죄를 저질러 온 것이 밝혀졌다.
11일 서부 유타주에서는 “멕시코인을 죽이겠다”며 타이어 수리점에서 일하던 히스패닉 부자에게 둔기로 무차별 폭행을 가한 백인 남성이 인종 혐오 범죄로 20년형을 받았다.
미 50개주 중 인구가 가장 많은 캘리포니아주에서도 지난해 유대인 대상 범죄가 24.3% 늘어난 것으로 조사됐다. 미 최대 유대인단체 ‘반명예훼손연맹(ADL)’은 2022년 미 전역에서 3697건의 반유대 혐오 범죄가 발생해 전년(2721건)보다 35% 늘었다고 발표했다. 최근 뉴욕주 등에서도 유대교 회당(시너고그)에 대한 연쇄 파괴 행위가 이어져 경찰이 수사에 나섰다.
대선 앞두고 더 기승
혐오 범죄의 급증은 대선을 앞두고 격화하고 있는 문화 전쟁과 무관치 않다는 분석이 적지 않다. 브라이언 레빈 캘리포니아주립대 ‘혐오 및 극단주의 연구소’ 소장은 인터넷매체 ‘복스’에 “편견이 담긴 시각으로 특정 그룹이 조명되면 해당 그룹을 겨냥한 ‘폭력의 사이클’이 발생하는 양상이 나타난다”고 지적했다.
폭력의 사이클은 특정 혐오 범죄의 촉매제 역할을 하는 사건이 발생한 후 그 후폭풍이 오래 지속되면서 해당 인종, 종교, 성 집단에 대한 폭력이 집중적으로 일어나는 현상을 의미한다. 2020년 백인 경관의 목 조르기로 흑인 조지 플로이드가 사망한 후 ‘흑인 생명은 소중하다(Black Lives Matter·BLM)’ 운동이 생겨났고 이후 흑인에 대한 혐오 범죄가 크게 늘었다.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이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의 발원지로 중국을 지목하고 ‘차이나 바이러스’라는 표현을 쓴 후에는 아시아계에 대한 범죄 또한 급증했다. 2001년 9·11테러 이후에는 무슬림에 대한 범죄도 대폭 늘었다.
시민단체 리더십콘퍼런스교육기금(LCEF)에 따르면 버락 오바마가 미 최초의 흑인 대통령으로 당선된 2008년에도 흑인 교회 방화 등 흑인에 대한 혐오 범죄가 급증했다. 2016년 대선 때는 당시 트럼프 후보가 남부 국경장벽 건설 등을 대선 쟁점으로 내세웠고 이후 히스패닉에 대한 범죄가 크게 늘었다. 마야 와일리 LCEF 회장은 USA투데이에 “당장 대책을 마련하지 않으면 내년 대선을 앞두고 혐오 범죄가 더 급증하는 양상을 보게 될 것”이라고 우려했다. ―볼티모어에서
문화 전쟁(culture war)
미국 사회에서 낙태, 동성혼, 성소수자, 총기, 인종차별 역사교육 등의 이슈를 두고 보수, 진보 진영이 각자의 가치를 지키기 위해 충돌하는 현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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