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록버스터가 아닌 중소형급 허리 영화가 아주 중요합니다. 큰 영화는 큰 영화대로 잘되고, 소소한 재밌는 이야기가 또 만들어져야 관객들도 질리지 않죠. 맨날 블록버스터 영화만 보고 싶지 않은 사람들도 있거든요. 보는 사람이 다양하게 골라서 볼 수 있는, 편하게 보고 나서 생맥주 한잔하고 싶은 그런 영화가 많이 만들어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15일 개봉한 중소형급 영화 ‘달짝지근해: 7510’에서 주인공 치호 역을 맡은 배우 유해진은 요즘 영화계의 대작 쏠림 현상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유해진은 이제 영화계에 거의 남지 않은, 영화에만 출연하는 진짜(?) ‘영화배우’다. 팬데믹 때 영화 개봉과 제작이 무기한 중단되면서 영화배우와 감독, 유능한 제작진 대다수가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 제작으로 넘어갔기 때문이다.》
그나마 남아 있던 영화계 투자금은 위험을 줄이기 위해 대작에 몰렸다. 한 영화 투자·배급사 관계자는 “팬데믹 이전이라면 손익분기점을 가뿐히 넘겼을 영화들이 고전하면서 투자자들이 신중해졌다. 흥행이 확실한 대작에만 투자하는 경향이 커져서 중소형 영화 제작 자체가 쉽지 않다. 투자가 잘 안되니 좋은 작품이 더 안 나오는 악순환이 이어지고 있다”고 말했다.
● 손익분기점 넘은 중소형 영화 ‘전멸’
팬데믹 이전과 비교하면 제작비 100억 원 미만의 중소형 영화 부진은 확연히 드러난다. 2019년 개봉한 영화 중 관객 수 1위는 제작비 약 85억 원을 들인 이병헌 감독의 ‘극한직업’이었다. 1600만 명이 관람해 전국 매출 약 1400억 원(영화관입장권통합전산망 기준)을 기록했다. ‘명량’(2014년·관객 1760만 명)에 이은 역대 한국 영화 관객 수 2위다.
2019년 개봉한 한국 영화 중 손익분기점을 넘긴 상업 영화는 19편이다. 그중 제작비 100억 원 미만인 영화는 13편이다. ‘82년생 김지영’(제작비 74억 원), ‘돈’(80억 원), ‘악인전’(80억 원), ‘가장 보통의 연애’(67억 원) 등이 그해 개봉한 영화 관객 수 ‘톱10’에 이름을 올렸다. ‘항거: 유관순 이야기’와 ‘벌새’는 제작비 10억 원 미만의 독립 영화지만 각각 115만 명, 14만 명이 관람하며 큰 성공을 거뒀다.
반면 올해 개봉한 영화 중 손익분기점을 넘은 중소형 작품은 단 1편이다. 공포 영화 ‘옥수역 귀신’으로, 25만 명이 봤다. 관객 수가 많지 않았지만 저예산 공포 영화여서 손익분기점(20만 명)을 넘길 수 있었다. 올해 개봉한 영화 중 관객 수 ‘톱10’에 드는 중소형 작품은 ‘리바운드’뿐이다. 제작비 약 70억 원이 들었고 68만 명이 관람해 손익분기점(190만 명)을 넘기진 못했다. 추석과 연말 개봉작들이 남았다는 점을 감안해도 팬데믹 이전인 2019년과 비교하면 올해 손익분기점을 넘은 중소형 영화는 사실상 ‘전멸’ 수준이다.
● 신인 감독·배우 발굴, OTT에 빼앗겨
중소형급 영화가 흥행에 고전하면서 전체 영화 제작 생태계에도 악영향을 미치고 있다. 가장 타격이 큰 건 신인 창작자들이다. 젊은 감독, 작가, 배우 등 창작자들은 보통 독립·예술 영화로 경력을 쌓은 뒤 투자를 받아 상업 영화로 데뷔하는 수순을 거친다. 하지만 팬데믹으로 투자자들이 영화계를 많이 떠난 데다 그나마 남은 투자자들은 검증된 베테랑 감독들의 대작에 몰리고 있다. 대작의 주연과 조연은 대부분 인지도가 높은 유명 배우들이 차지하기 때문에 자연스레 영화로 데뷔하는 신인 배우도 찾아보기 어려워졌다.
영화계가 팬데믹 기간 ‘동맥경화’를 겪는 사이 OTT가 그 빈틈을 메웠다. 넷플릭스는 막강한 자본력을 바탕으로 신인 창작자들을 빨아들였다. 이들을 활용하면 적은 비용으로 현지에서 어떤 콘텐츠가 잘되는지 실험해 볼 수 있다. 운 좋게 작품이 잘될 경우 이익을 최대한으로 뽑아낼 수 있다. 창작자 입장에선 투자를 못 받아 제작이 무기한으로 밀리는 것보다 OTT를 통해 데뷔하는 쪽이 낫다. 넷플릭스 드라마 ‘고요의 바다’(2021년)의 최항용 감독, ‘소년심판’(2022년)의 김민석 작가, ‘인간수업’(2020년)의 배우 남윤수 박주현 등이 넷플릭스를 통해 데뷔한 신인들이다. 다만 넷플릭스 등 OTT는 제작비를 지원하는 대신 지식재산권(IP)에 대한 권리를 모두 가져가는 방식으로 계약을 맺는다. 흥행 수익은 창작자에게 거의 떨어지지 않는 구조다. 신인 창작자일수록 수익 배분에서 불리한 위치에 놓인다는 맹점이 있지만 영화계 투자 자체가 위축된 상황에서는 선택권이 별로 없다.
한 대형 투자·배급사 관계자는 “영화감독이라면 누구나 자신의 영화를 스크린에서 상영하는 걸 꿈꾸지만 팬데믹 이후 신인 감독들에게 그런 기회의 폭이 좁아진 게 사실”이라며 “배우뿐 아니라 작가, 배우, 제작진이 OTT로 넘어가 아직 돌아오지 않다 보니 중소형 영화 제작 자체가 잘되지 않고 있다”고 했다.
게다가 비성수기에 개봉해 사랑받던 중소형 작품들이 없어지니 관객들은 볼만한 블록버스터가 개봉할 때만 연례행사처럼 극장을 찾고 있다. 올해 5월 정부가 사실상 엔데믹을 선언했지만 영화계의 기대만큼 관객 수가 회복되지 않고 있다. 영화진흥위원회에 따르면 올해 상반기(1∼6월) 영화산업 매출액은 6078억 원으로 팬데믹 이전의 70% 수준에 그쳤다.
● 한국 영화 다양성에 악영향
중소형 영화가 부진하면서 한국 영화의 다양성이 줄어들고 있다. 중소형 영화들이 주로 다루는 코미디, 드라마, 로맨스 영화가 사라지고 있는 것. 올해 손익분기점을 넘은 영화는 모두 범죄물이다.
지난달 제22회 뉴욕 아시안 영화제에서 영화 ‘킬링 로맨스’(2023년), ‘유령’(2023년)으로 최우수 연기상을 수상한 배우 이하늬는 파격적인 중소형 코미디물인 ‘킬링 로맨스’를 선택한 이유에 대해 이렇게 밝혔다. “색깔 있는 한국 영화가 원래도 부족했는데 더 없어지고 있다. 그게(개성이) 한국 콘텐츠의 힘인데 우리 스스로 그 힘을 잃어가고 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색깔 있는 감독이 계속 힘 있게 작업했으면 좋겠다는 마음이었고 이 영화는 꼭 세상에 나와야 한다고 생각했다.”
박기수 한양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는 “요즘 관객들은 미리 유튜브 등을 통해 영화 소개 영상을 본 뒤 이 작품이 어떤 즐거움을 줄지 명확한 기대가 생겨야 극장으로 향한다”며 “자연스레 많은 자본, 유명한 배우가 기존에 없던 낯선 이야기를 하는 블록버스터, 액션 영화로 승부를 보고자 하는 경향이 강해졌다”고 진단했다. 블록버스터 영화는 할리우드 영화와 경쟁해야 하는데 아직 우리나라의 자금력과 기술력이 할리우드를 따라가기에는 부족해 외화를 선호하는 경향이 심해질 수 있다는 분석이다.
김성수 대중문화평론가는 “중소형 영화가 부진하면 정말 한국 영화 위기가 시작될 것”이라면서 “중소형 콘텐츠가 잘돼야 검증받은 좋은 제작자들이 더 크고 좋은 작품을 만드는 생태계 선순환이 된다”고 했다. 이어 “콘텐츠 대전환기에 다양한 영화가 개봉할 수 있도록 정부 지원이 필요한 시점”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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