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내년 국가 주요 연구개발(R&D) 예산을 올해보다 13.9% 줄어든 21조5000억 원으로 책정했다. 주요 R&D 예산이 줄어든 건 2016년 이후 8년 만이다. 일반 R&D를 포함한 국가 전체 R&D 예산도 1991년 이후 33년 만에 삭감될 것으로 보인다. 외환위기와 금융위기 와중에도 증가했던 국가 R&D 예산이 ‘R&D 카르텔’을 질타한 대통령의 말 한마디에 구조조정에 들어간 것이다.
어제 과학기술정보통신부는 나눠 먹기·성과 부진·단기 현안 대응 사업 108개를 통폐합해 내년도 주요 R&D 예산 3조4000억 원을 줄였다고 발표했다. 인공지능과 양자, 첨단바이오 등 미래전략기술 예산은 증액됐지만 기초연구와 정부 출연 연구기관 예산은 축소됐다. 기초연구 예산은 올해 2조4000억 원으로 올해 대비 6.2%(2000억 원), 25개 과학기술 분야 출연연 예산은 2조1000억 원으로 10.8%(3000억 원) 줄었다.
정부는 낡은 관행을 타파하고 예산을 효율화했다는 입장이지만 예산 구조조정이 졸속으로 추진됐다는 비판을 피하기 어렵다. 국가 R&D 예산안은 법적으로 6월까지 확정돼야 한다. 하지만 6월 말 대통령이 전면 재검토를 지시하면서 돌연 심의가 미뤄졌고, 감사원은 R&D 운영실태에 대한 감사에 착수했다. 출연연 등이 예산 감축을 전제로 부랴부랴 과제 수정에 나서면서 내년 연구사업이 부실해질 수 있다는 우려가 나왔다.
연구비 나눠 먹기와 과제 쪼개기, 중복투자 등 R&D 예산의 비효율은 당연히 바로잡아야 한다. 하지만 충분한 검토 없이 일괄 삭감을 밀어붙이는 것은 빈대 잡자고 초가삼간 태우는 격이다. 연구 현장에선 당장 내년 신규 사업은 꿈도 못 꾸고, 대형 장비 운용에 차질을 빚을 것이라는 목소리가 나온다. 자긍심 하나로 연구 현장을 지켜온 과학자들이 ‘카르텔’로 지목받으며 사기가 크게 저하된 것도 걱정이다.
과학기술 기초역량을 끌어올리고 기술패권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안정적이고 장기적인 투자가 필요하다. 연구에 효율의 잣대만 적용하면 도전적인 과제는 피하고, 당장 성과를 낼 수 있는 과제에 매몰될 수 있다. 예산 절감과 카르텔 타파가 미래 경쟁력을 훼손하는 결과로 이어지는 일이 있어선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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