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이철희]원폭과 봉쇄, 두 아이콘의 좌절

  • 동아일보
  • 입력 2023년 8월 30일 23시 45분


과학·지성 날개 꺾은 흑백의 정치
영화 ‘오펜하이머’의 무거운 질문

이철희 논설위원
이철희 논설위원
“제길, 하필 저는 이 나라를 사랑한단 말입니다.(Damn it, I happen to love this country.)”

크리스토퍼 놀런 감독의 영화 ‘오펜하이머’에서 원자폭탄 개발의 주역 J 로버트 오펜하이머는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에게 이렇게 말한다. 과거 좌익 활동 전력 때문에 비공개 청문회에 불려가 자신의 삶 전부가 발가벗겨진 오펜하이머에게 아인슈타인이 “자네는 자넬 사랑하지 않는 여인(미국 정부)을 쫓고 있네”라며 이제 미련을 버리라고 충고하자 한 말이다.

사실 이 장면은 외교관 출신으로 동갑내기 친구였던 조지 케넌이 훗날 오펜하이머 추도식에서 회고한 둘의 대화 내용을 아인슈타인의 당시 의견과 함께 엮어 영화적으로 재구성한 것이다. 그런 수모를 당하느니 외국 대학으로 갈 생각은 없느냐고 묻는 케넌에게 오펜하이머는 눈물을 글썽이며 그렇게 말했다고 한다.

케넌은 8000단어의 ‘긴 전문’과 익명의 ‘X 논문’으로 대소련 봉쇄정책을 기초한 인물. 한때 미국 외교의 아이콘으로 떠올랐지만 자신이 주창한 봉쇄정책이 외교를 배제하고 군사 일변도로 흐르는 것에 반론을 제기하면서 “몽상가”라는 손가락질과 함께 정책 결정 라인에서 밀려났다. 오펜하이머는 그런 그를 위해 프린스턴고등연구소에 안식처를 마련해줬다.

케넌은 반유대주의적 편견을 가진 앵글로색슨계였지만 유대계인 오펜하이머와는 죽이 잘 맞았다. 두 사람은 냉전 초기 핵무기 정보 공유와 국제적 통제, 수소폭탄 개발 반대, 그리고 20년 뒤에나 시동을 거는 핵군비통제까지 거의 모든 생각에 공감했다. 그런 케넌도 뛰어난 전략가로서 짧은 각광을 받은 뒤엔 101세를 일기로 세상을 뜰 때까지 긴 아웃사이더의 삶을 살았다.

케넌은 영화 ‘오펜하이머’에 등장하지 않는다. 수많은 과학자와 군인, 정치인이 나오는 터라 케넌이 끼어들 자리는 없었을 것이다. 이 영화의 플롯은 ‘유대인 대 유대인’의 대결 구도로 짜여 있다. 원폭이 초래한 비극을 보고 그 1000배 위력의 수폭 개발에 반대하는 오펜하이머의 대척점엔 유대인 보수주의자 루이스 스트로스가 있다. 이 둘의 뒤편에서 오펜하이머를 동정하는 아인슈타인도, 수폭 개발에 매달리는 에드워드 텔러도 모두 유대인이다.

사실 원폭 개발 자체가 ‘유대인 프로젝트’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당시 유수의 물리학자 중 유대인 비율이 압도적으로 높았던 데다 나치 독일의 박해를 피해 도망쳐 나온 유대인 과학자들이 미국 대통령에게 편지를 보내 시작된 것이 맨해튼 프로젝트다. 오펜하이머를 파멸로 이끈 스트로스도 한때 유대계 물리학자의 연구를 지원한 후원자였다.

영화는 이런 유대인 간 대결을 통해 과학과 정치의 충돌을 극적으로 보여준다. 오펜하이머는 핵폭발이 세계를 멸망시킬 가능성이 ‘거의 0(near zero)’임에도 불확실한 미래를 걱정한다. 그런 그에게 대통령은 소련이 언제쯤 원폭을 만들 수 있겠느냐는 질문을 던지고는 ‘모른다’는 대답에 “나는 안다. 결코 못 만든다”고 자신하고, 얼마 뒤 소련이 원폭을 개발하자 내부 간첩부터 의심하는 정부 실력자는 매카시즘의 광풍 속으로 오펜하이머를 몰아넣는다.

놀런 감독이 각각 핵분열(fission·원폭)과 핵융합(fusion·수폭)이란 이름을 붙여 컬러와 흑백을 교차시킨 것은 시간대를 오가는 혼란스러운 극 전개에 관객의 이해를 돕기 위한 기술적 장치로 보인다. 한편으로 컬러와 흑백의 대비는 지식인과 권력자 간의 격렬한 부딪침으로도 다가온다. 인공지능(AI) 무한경쟁과 기후변화 위기의 시대, 핵폭탄을 둘러싼 이야기는 지금의 우리에게 묵직한 질문을 던지고 있다.

#원폭과 봉쇄#오펜하이머#흑백의 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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