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김재영]‘전관 카르텔’만 때린다고 ‘순살’ 못 막는다

  • 동아일보
  • 입력 2023년 9월 4일 23시 4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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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H 전관 특혜·담합만 정조준한 정부
처벌 넘어 시스템 대수술 해법 찾아야

김재영 논설위원
김재영 논설위원
누가 처음 사용했는지 몰라도 ‘순살 아파트’는 기가 막힌 작명이다. 원희룡 국토교통부 장관은 이 표현이 정확하지 않다며 자제해 달라고 했다. 보강철근이 빠져 있는 것이지 철근 자체가 빠진 건 아닌데 국민들이 오해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반드시 있어야 할 것을 빼먹은, 그래서 국민의 안전을 위협하는 총체적 부실을 이만큼 직관적이고 감각적으로 설명하는 표현을 찾긴 힘들다.

아파트 지하 주차장 철근 누락 사태에 대해 정부가 대신 찾은 표현은 한국토지주택공사(LH)의 ‘전관 카르텔’이다. 이 역시 일타강사다운 단순하고 명쾌한 표현이다. 설계니 공법이니 감리니 하는 건 복잡하고 이해하기 어렵다. ‘나쁜 놈들이 짬짜미로 다 해먹었다’고 하면 누구나 단번에 이해가 간다. 경찰과 검찰은 LH에 대해 강제 수사에 나섰고, LH는 퇴직자가 근무하고 있는 전관 업체와 체결한 설계·감리 등 용역 계약을 전격 해지했다. ‘전관 카르텔’ 척결의 칼날은 LH를 넘어 도로, 철도, 항공 등으로 확대되고 있다.

LH의 전관 카르텔은 실체가 있다. 반드시 도려내야 할 부조리다. 감사원에 따르면 2016∼2021년 LH의 3급 이상 퇴직자 600여 명 중 절반 이상이 LH 계약 업체에 재취업했다. 이 기간 전관 업체에 몰아준 일감은 9조 원이 넘는다. 철근 누락 아파트의 설계·감리를 맡은 전관 업체 25곳은 최근 3년간 3232억 원의 수의계약을 따냈다. 업계에선 LH의 ‘OB(전관)’ 한 명 영입하지 않은 곳을 찾기 어렵다고 한다.

하지만 전관 카르텔 타파의 구호가 커지면서 인천 검단아파트 지하 주차장 붕괴 사고에서 비롯된 다양한 이슈들이 수면 아래로 가라앉아 버렸다. 철근을 빼먹은 아파트 명단이 7월 말 공개된 직후까지만 해도 부실한 설계, 엉뚱한 시공, 깜깜이 감리 등 무너진 건설 시스템을 어떻게 바로잡을 것인가에 관심이 쏠렸다. 하지만 카르텔이 원인으로 지목된 이후에는 LH의 전관 특혜와 도덕적 해이만 부각되고 있을 뿐이다.

사실 구조적 원인은 설계, 시공, 감리가 따로 놀았다는 데 있었다. 각자의 역할을 하지 못했을뿐더러 크로스체킹 시스템도 실종됐다. 설계에서 빼먹은 걸 나중에 바로잡기는커녕 시공 과정에서 또 한 번 빼먹는 부실의 누적이 이뤄졌다. 현장에선 사업을 총괄할 프로젝트매니저가 보이지 않았다. 1994년 성수대교 붕괴 이후 공무원의 비리를 막겠다며 도입된 책임감리제는 공무원과 발주 기관의 책임 회피 수단이 됐다.

만성적 인력난에 시달리는 현장은 부실 시공의 시한폭탄이다. 건설 현장에선 50대 미만의 한국인, 특히 잔뼈 굵은 숙련공은 찾기 힘들다. 청년들의 건축·토목 기피 현상은 이미 오래됐고, 현장 인력들조차 ‘탈건(탈건설사)’을 꿈꾼다. 공법은 갈수록 복잡해지는데 도면을 제대로 이해하는 사람은 적고, 과거의 경험에 기댄 적당주의가 판을 친다. 현장의 공백은 중국, 베트남 등에서 온 비숙련의 일용직 외국인이 메우고 있다. 사실상 국내에 ‘메이드 인 코리아’ 아파트는 없다는 말까지 나온다.

철근 누락 사태의 해법은 1차 방정식이 아닌 복잡한 고차 방정식이다. 고질적 불법 재하도급 해소, 저가 수주를 부르는 입찰제도의 개선, 우수한 현장인력 확보, 독립적 감리 체계의 도입 등을 종합적으로 검토하고 이중 삼중의 안전장치를 쌓아야 한다. 안전과 품질을 높이면서도 공사비 상승이 집값을 자극하지 않도록 하는 건 쉽지 않은 미션이다. 대학수학능력시험이라면 소위 ‘킬러 문항’을 배제하고 쉽게 풀면 되겠지만 현실 문제는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전관 카르텔’ 척결만 앞세우고 근본적 시스템 개선을 등한시하면 영영 고득점을 받긴 어려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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